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23일 6·25 전쟁을 “제국주의의 침략”이라고 부르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향한 중대한 이정표”라고 말했다. 시 주석은 이날 중국군 6·25 참전 70주년 기념대회 연설에서 “우리는 국가 주권 이익이 침해되는 상황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드시 정면으로 통렬한 반격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중국 지도자의 6·25 참전 기념 연설은 2000년 장쩌민 주석 이후 20년 만이다.
외교가에선 “중국이 70년 전 6·25를 소환해 한반도를 미·중 전쟁의 격전장으로 만들려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을 미국 중심의 아시아·태평양 동맹 전선의 ‘약한 고리’로 보고 경제·안보에서 “미국 편에 서지 말라”고 압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미·중 사이에서 애매한 태도로 일관, 양국 싸움의 최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시 주석은 연설에서 6·25전쟁에 대해 “제국주의 침략 확대를 억제하고 중국의 안전을 수호한 것”이라며 “침략자(미국)를 때려눕혀 ‘신중국(新中國)’의 대국 지위를 세계에 보여줬다”고 주장했다. 이는 6·25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 마오쩌둥의 지원 약속을 받은 북한 김일성의 남침 전쟁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유감 표명이나 항의 한마디 없이 침묵했다.
시 주석은 “오늘날 세계에서 봉쇄, 극단적인 압박, 패권 행동은 통하지 않는다”며 “이런 방식은 ‘죽는 길(死路)’”이라고 했다. 또 “중·조(북한) 양국 인민과 군대는 생사를 서로 의지하고 피로써 위대한 전투 우의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미국의 대중 압박 정책과 이에 동조하는 건 ‘죽는 길’이라고 위협하면서 반미 연대를 강조한 것이다. 미·중 갈등에서 우리 정부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이달 예정된 미 국무장관의 방한이 취소된 데 이어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방한도 취소됐다.
시진핑, CNN까지 불러 ‘6·25 승리’ 기념... 中매체 “美 두렵지 않다”
“오늘날 세계에서 일방주의, 보호주의, 극단적 이기주의는 통하지 않는다. 위협, 봉쇄, 압박은 통하지 않는다. 제멋대로 구는 패권(霸權) 행동은 통하지 않는다. 통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막다른 길(死路)이다.”
23일 중국군 6·25 참전 70주년 기념 연설을 하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베이징 인민대회당에 모인 참석자 수천명은 일제히 손뼉을 쳤다. 중국 관영매체는 연설을 생중계했다.
이날 행사에는 시 주석을 비롯해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7명) 등 지도부가 총출동했다. 좌담회 형식으로 열린 2010년 6·25 참전 60주년 기념 행사와 달리 미 CNN 등 외신을 초청했다. 가장 달라진 것은 시 주석의 메시지였다.
시 주석은 국가 부주석이던 2010년에도 당·정·군을 대표해 6·25 전쟁 기념 연설을 했다. 당시 그는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돕는다는 뜻) 60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미국에) 계속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애국심을 강조하면서도 ‘전면적인 샤오캉(小康·중산층 생활수준) 사회’ 달성 등 국내 목표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날 연설에서 시 주석은 “주권, 안전, 발전 이익이 침해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며 “중국 인민은 반드시 정면으로 통렬한 반격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홍콩 매체들은 이 발언이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 해석했다. 미국이 대중(對中) 견제 확대를 위해 한국에 쿼드(Quad·미국, 일본, 인도, 호주로 구성된 안보 협의체), 클린 네트워크(중국 기업을 배제한 통신망) 참여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사의 비극인 6·25 전쟁을 소재로 미국에 경고한 셈이다.
미국은 올 들어 중국에 대한 총공세를 펴왔다. 화웨이 등 중국 기업에 대한 제재를 확대하고 대만에 무기 판매도 늘리고 있다. 또 중국이 홍콩 국가보안법을 시행하자 홍콩에 대한 무역, 관세 등 특별 지위를 철회했다. 중국 내에서는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서도 미국에 맞설 카드가 마땅하지 않은 상황에서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시 주석이 발언 수위를 조절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
하지만 시 주석은 이날 6·25 전쟁이 “중국 인민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줬다”며 애국주의를 강조했다. 또 “중국 인민은 어떤 어려움과 도전에도 겁먹거나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6·25 당시 한·미가 함께 고난을 겪었다는 한국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탄(BTS)의 발언을 문제 삼았던 중국 매체 환구시보 후시진 편집인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70년 전 우리(중국)가 가난하고 약했던 때에도 미국 침략자를 물리쳤는데, 오늘 부강해진 중국이 미국의 위협과 압박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했다.
시 주석은 “강력한 군대가 없다면 강한 조국도 없다”며 “시대에 맞게 국방을 강화하고 군대를 건설하며 당(黨)의 국방 강화 목표를 추구해 간다면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에 강력한 힘을 보탤 것”이라고도 했다.
시 주석의 연설이 6·25 전쟁 최대 피해국인 한국에 대한 배려가 전무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 주석은 10년 전 연설에서는 6·25 전쟁이 “정의의 전쟁”이라는 중국 당국의 입장을 반복하면서도 “참혹한 전쟁이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남겼다”며 한반도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평화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번 연설에서는 이런 대목이 빠졌다.
한편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국의 6·25 전쟁 참전 70주년을 맞아 지난 22일 중국 선양(瀋陽)의 항미원조 열사릉과 단둥(丹東)의 항미원조 기념탑에 꽃바구니를 보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3일 보도했다.
화환에는 김 위원장의 이름과 함께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들은 영생할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혔다. 주중 북한 대사와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간부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 및 랴오닝·선양·단둥시 간부들이 진정식에 참석했다.
앞서 김정은은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 능원을 찾아 참배하고, 그날 평양 소재 북중 우의탑에 화환도 보냈다고 전날 북한 관영매체들이 전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지난 21일 회창군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릉에 화환을 보냈다. 북중 양국이 이처럼 연일 중공군의 6·25 전쟁 참전을 기념하는 것은 미중 갈등이 격화된 상황에서 북중 친선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