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시카고의 앤 앤드 로버트 H 루리 아동병원의 의사가 지난해 원격으로 아동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 앤 앤드 로버트 H 루리 아동병원
미국의 원격의료 플랫폼인 '닥터 온 디맨드'를 통해 텍사스의 한 의사가 지난 4월 화상으로 환자를 만나기 위해 진료실에서 준비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국 메릴랜드에 사는 국책연구소 연구원 스테퍼니(43)씨는 지난 몇 년 동안 갑상선 질환 때문에 한두 달에 한 번 30~40분 거리의 시내 대형 병원에 통원 치료를 다녔다. 병원에 가서 치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까지 보통 2시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작년부터 병원 진료 시간이 되면 직장에서 컴퓨터 앞에 앉는다. 병원이 이메일로 보내준 줌(화상회의) 링크로 접속, 주치의와 화상으로 상담하는 데 20분이면 족하다. 혈액 검사는 집 근처 외주 검사 업체에서 하면 그 결과가 병원에 넘어가고, 복용약도 의사가 동네 약국으로 처방전을 보내준다. 스테퍼니는 “코로나가 끝나더라도 원격진료만큼은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전 세계에서 원격의료가 폭발적으로 성장 중이다. 주요 국가들은 규제를 대폭 완화, 시간·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환자 진료와 치료를 극대화하는 의료 신기술이 맘껏 펼쳐지도록 판을 깔아주고 있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그랜드뷰서치는 전 세계 원격의료 시장 규모는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된 지난해부터 연평균 22.4%씩 성장해 오는 2028년에는 2989억달러(약 331조1812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2019년 미국 내 전체 진료 건수의 0.15%에 불과했던 원격진료는 2020년 3월 코로나 팬데믹 선언 직후 13%로 늘었다”고 보도했다. 순식간에 100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대도시 유명 병원들도 지난해 원격진료 건수가 예년에 비해 30~40배씩 늘었다. 프랑스도 원격진료가 폭풍 성장했다. 작년 2월 4만건이었는데 1차 봉쇄령이 내려진 4월엔 450만건이 됐다.

의료 변화의 가장 큰 혜택을 받는 건 환자와 국민들이다. 미 각 주의회에는 코로나 와중 한시적으로 허용됐던 원격의료를 무기한 연장할 수 있게 해달라는 법안만 600여건 발의돼 있다. 이런 추세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원격의료가 여전히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질병청이 감염병 ‘심각 단계’를 발령한 후 일시적으로 화상 통화 등을 이용한 원격의료가 일부 허용되고 있을 뿐이다.

美, 앱으로 원하는 의사·시간 선택 가능… 대면 진료비의 반값

가끔 편두통을 느끼는 기자는 지난달 19일 파리에서 원격진료를 예약했다. 스마트폰으로 프랑스 ‘국민의료 앱’으로 불리는 ‘독토리브(Doctolib)에 들어가 의사를 찾았다. 파리 15구 펠릭스 포르 거리에서 의원을 운영하는 앙드레 세바라는 의사가 이튿날 오후 6시 진료가 가능하다고 떴다. 간단한 인적 사항을 넣고 신용카드로 상담 비용 25유로(약 3만4000원)를 결제했다. 바로 예약이 잡혔다.

다음 날 약속 시각이 되자 독토리브에서 보내준 링크를 노트북에서 클릭했다. 화면에 나타난 의사 세바씨는 증상을 자세히 묻고 편두통을 해소하는 다양한 운동 방식과 생활 습관을 일러줬다. 차도가 없으면 다시 보자고도 했다. 그는 “매일 10~12명쯤 화상으로 만난다. 전체 환자의 30% 정도다”라며 “코로나 사태 이후 감기 환자를 직접 보기가 겁나 원격의료를 시작했는데 효율적 시간 관리가 가능해지는 등 장점이 많다”고 했다. “팬데믹 이후에도 환자의 30% 정도는 원격으로 보려 한다”고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원격의료가 코로나를 계기로 완전히 정착했다. 지난해 1900만회 원격의료가 이뤄졌다. 사회보험에서 상담비를 환급해주는 진료의 5.4%를 차지했다. 전년도엔 0.1%에 불과했다. 한 번 이상 원격의료를 체험한 프랑스인은 전 국민의 20%로 추산된다.

독토리브 같은 원격의료 플랫폼은 20개 정도가 있다. 선두 주자인 독토리브엔 원격의료가 가능한 의사 3만여 명이 등록돼 있다. 앱으로 의사의 진료 분야, 졸업 대학, 수련 병원 등을 다 알 수 있다. 의사가 어떤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지도 나온다. 스마트폰·태블릿으로도 영상 상담이 가능해 사무실이나 공원에서도 의사를 만날 수 있다. 처방전은 온라인으로 보내준다. 원격진료를 하고 나면 대면 진료와 마찬가지로 상담비를 환급해 준다. 기자가 낸 25유로도 나중에 환급된다. 결국 공짜인 셈이다.

미국 원격의료 플랫폼 대표 주자는 뉴욕주에 본사를 둔 텔라닥(Teladoc)이다. 보험 종류와 성별, 언어, 질환 등을 입력하면 원하는 시간대, 원하는 의사를 선택할 수 있다. 1회 진료비는 대면 진료비의 절반 정도이다. 지난해 팬데믹 선포 직후 텔라닥 정기 회원은 2배 이상 늘어난 7000만명이 됐다.

미 버지니아에 사는 직장인 애슐리(47)씨는 최근 갑자기 이석증(귓속 이동성 결석으로 인한 어지럼증) 증세로 심한 현기증과 구토를 겪었다. 한밤중에 응급실에 가려다 직장에서 단체 가입한 텔라닥 어플에 접속해 ‘응급 진료’를 신청했더니, 10분 만에 가정의학과 일반의가 연결됐다. 총 비용은 49달러(약 5만4000원). 보험 처리 후 본인 부담은 9달러(약 1만원)였다. 애슐리씨는 “응급실에 갔으면 똑같은 진단·처방을 받는 데 수천달러를 냈을 것”이라며 “속도와 비용 면에서 획기적 경험이었다”고 했다.

미국은 원격의료의 역사가 길다. 영토가 넓고 의료비가 비싸 병원 문턱이 높기 때문이다. 1950년대부터 의료 낙후 지역에서 처음 전화 의료가 허용됐고, 1960년대 미 항공우주국(NASA)이 우주탐사대원들을 위한 화상 진료를 하면서 기술적 진화를 거듭했다. 1990년대부턴 대면 진료와 원격의료의 보험 적용에 차별을 두지 않는 법제화가 잇따랐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 사태로 ‘3차 빅뱅’을 맞았다. 포천비즈니스인사이트에 따르면 미 원격의료 시장은 2018년 410억달러(약 46조원)에서 2026년 3960억달러(약 446조원)로, 연평균 25~28%씩 성장할 전망이다.

원격의료의 장점으론 환자나 병원, 보험사 모두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점, 비인기 과목의 의료진 공급난을 일부 해소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꼽힌다. 전문가들은 의학의 패러다임이 ‘사후 치료’에서 ‘예방’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점에도 의미를 둔다. 원격의료에 사용되는 다양한 자가 모니터링 기술, 의료진과의 부담 없는 잦은 접촉 등으로 건강 상태를 더 면밀히 자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급속한 원격의료 확대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의료진이 환자를 자세히 문진하지 못해 오진(誤診)하거나, 항생제 남용 등 과잉 진료를 하기 쉽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부자들은 여전히 정밀한 고급 대면 진료를 선호할 것”이라며, 서민·중산층의 간편한 원격 의료 의존이 계층 격차를 키울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