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지금의 한국으로 성장하게 한, 지난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미국 주도 세계 질서에 미국은 이제 신물이 났습니다. 자유 무역 확대로 미국의 시장을 내주고 세계 곳곳에 동맹을 추구하던 시대 말이죠. 그리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이런 미국의 변화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는 무관하게 더 가속화할 겁니다.”
지정학 전문가이자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인 피터 자이한 ‘자이한 지정학연구소’ 소장은 최근 WEEKLY BIZ와 화상 인터뷰에서 “미국의 급변을 트럼프라는 변수가 만들어낸 이례적 돌발 상황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난 수십 년간 국제 질서를 유지하고 자유무역을 보장하면서 세계 경찰 역할을 자처해온 ‘수퍼파워’ 미국은 이제 없어진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역사를 감안하면 한국에겐 탐탁지 않은 일일지 모르지만 이런 시대에 한국의 선택지는 하나, 일본과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뿐이다”라고 했다.
자이한과의 인터뷰는 미국의 관세 정책이 수시로 바뀌고,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폭격해 니콜라 마두로 대통령을 축출하고, 그린란드를 두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인 미국과 유럽이 대립하는 와중에 이뤄졌다. 이란과 미국의 갈등도 일촉즉발로 치닫는 상황이었다. 복잡한 세계 정세를 압축적으로 요약하는 촌철살인으로 유명한 그는 지금 지구촌의 상태를 ‘한 줄 평’으로 정리해 달라고 하자 한숨과 웃음을 섞어 내쉬며 말했다. “아이구머니나(Boy howdy)!”
◇“주한미군, 미 이익에 이제 부합 않는다”
-트럼프가 벌이는 관세 전쟁은 결국 어떻게 될까.
“한국이 이 혼란을 이겨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한 성격에 미 행정부의 미숙함이 겹쳐 한국 입장에선 누구와 협상해야 할지조차 혼란스러운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가 물러나면 이 모든 문제가 사라지리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미국은 현재 매우 중대한 국가적 재편을 거치고 있다. 오히려 트럼프의 요란함이 미국의 근본적 변화를 놓치게 만드는 상황이다.”
-그 근본적 변화가 무엇인가.
“미국이 원하는 미래 세계의 모습은 아직 미완이다. 하지만 ‘미국이 원하지 않는 미국’은 명확하다. 미국은 냉전 시대부터 수행해 온 해상 안보 보장, 글로벌 법치 유지, 자유무역 촉진과 이를 위한 미국 시장 개방 등에 무심해지고 있다. 여기엔 한국 비무장지대 안보도 들어간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지난 수십 년간 세계 질서를 유지해 준 ‘수퍼파워’ 미국을 기반으로 재건과 성장에 성공했는데 앞으로의 미국은 이런 활동에 공을 들일 가능성이 없다. 한국과 미국의 생산적 관계가 불가능해졌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생산적 관계’가 지금과는 매우 다른 모습일 것만은 확실하다.”
-어떻게 달라질까.
“미국은 오늘날 한국에 대해 크게 두 가지에 집중한다. 한반도의 안보 과잉 문제, 또 하나는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고 빼어난 건조(建造) 기술을 갖춘 한국 기업과의 기술적 파트너십이다. 전자는 꺼려지는 반면, 후자는 탐이 나는 상반된 상황이다. 미국은 반도체 기반 시설과 기술 측면에서 벽에 봉착했다. 미래에 한국은 아마도 그 기술을 중심으로 미국과 경제적 협력 관계를 어느 정도 유지하게 될 것이다. 반면 미국의 광범위한 안보 보장이 지속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 미국은 한국이 안보 측면에서 스스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과 안보가 반대의 방향을 향하는 이런 구도는 지금과는 매우 다른 한국, 매우 다른 한반도, 아울러 매우 다른 한일 관계를 의미한다.”
-미국에 한국 조선업이 절실한가.
“만약 2년 전쯤 그 질문을 들었다면 ‘아니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미국은 배를 분명히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여러 해 동안 조선소 확장을 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어라? 시간이 없네?’라는 상황에 봉착했다. 조선업의 경우 한국이 확실히 그 분야에 매우 뛰어나다. 나는 현재 진행 중인 관세 재협상에서 한국이 조선업 ‘카드’를 최대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를 권한다. 한국이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할 방법은 결국 이 같은 첨단 기술이다”
자이한은 ‘수퍼파워’이길 거부하는 미국의 변화 원인을 크게 둘로 본다. 장기적으로는 1990년대 초 냉전이 옛 소련의 패배로 막을 내리면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세계 각지에 동맹국을 유지할 이유가 없어졌다. 단기적 요인은 미국 내 셰일가스 개발이다. 즉 미국의 석유 등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낮아져 중동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 공급망 유지에 집착할 유인이 사라졌다. 냉전 종식으로 인해 일찌감치 불필요해진 ‘세계 안보 지킴이’ 역할을 에너지 수요 때문에라도 지속해왔지만, 이제는 그 부담조차도 벗었다는 뜻이다.
-이런 변화는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주둔 미군의 축소를 촉발할까.
“항공모함 승조원 등 이동 병력을 제외하면 해외에 주둔하는 미군은 10만명 정도다. 그중 거의 3분의 1이 한국에 있다. 나머지 중 상당수가 바로 옆 일본에 있는 판에 말이다. 주한 미군의 역할을 요약하면 ‘한국이라는 동맹국 하나 방어’다. 전략적으로 계산이 영 맞지 않는다. 미국이 미래에 아시아에서 위력을 과시하고 싶다면 일본이 더 가치 있는 파트너다. 지금과는 매우 달라질 새로운 미국에겐 한국 비무장지대에 배치한 고정 병력이 전만큼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결국 한국의 안보는 한국의 책임이 되리라는 뜻이다.”
◇“한일 관계 미국이 중재? 기대 접어라”
자이한은 “미국의 주요 수입품 중 하나였던 에너지 문제가 해결된 판에 남은 취약점은 중국 등 아시아에 의존해온 공산품이다. 이는 캐나다·멕시코와 관계를 건설적으로 유지한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했다. 미주 대륙에 집중하고 유럽과는 거리를 두는 1800년대 미국의 ‘먼로주의(Monroe Doctrine)’식 외교 기조가 어떤 형태로든 돌아오리라는 얘기였다. 그는 “미국이 동반구 현안에선 전보다 물러서고 서반구에 훨씬 집중하리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서반구’는 미주 대륙, ‘동반구’는 그 밖의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등을 뜻한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무심해지면 한국은 스스로를 어떻게 보호해야 하나.
“미군이 아시아에 주둔한다면 중심은 결국 호주와 일본이 될 것이다. 한국으로선 일본과의 관계를 공고히 다지는 방법밖에는 해결책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한일 관계 진전은 매우 긍정적이다. 일본의 경제 규모가 훨씬 크기 때문에 한일 관계를 안보적 측면에서 재정립할 부담은 한국에 있다. 과거사를 생각하면 이런 조언이 얼마나 끔찍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안다. 하지만 이제 예전처럼 미국이 한국을 대신해 일본과의 갈등 해소를 중재해줄 이유가 없어진다. 한일 관계 개선 부담이 한국으로 더 돌아오게 됐다는 의미다.”
-최근 일본과 중국의 갈등이 고조됐는데, 무력 충돌도 가능할까.
“군사적 충돌은 변수가 너무 많아 실제로 닥치기 전에는 예상하기 어렵다. 나는 더 큰 구조적 문제에 집중하고 싶다. 일본은 1980년대만큼 무역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반대로 오늘날 중국은 1980년대 일본보다도 무역 의존도가 높다. 군사력 차이도 크다. 일본 해군은 미국의 지원 없이도 전 세계를 항해할 수 있다. 중국 해군은 제1도련선 너머로조차 진출할 역량이 안 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최근 경험 많은 군 수뇌부를 해고하고 정보 당국까지 숙청했기 때문에 상태는 더 안 좋아졌다. 웬만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한다면 일본은 찰과상을, 중국은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제1도련선’은 중국 연안에서 가장 가까운 섬들의 띠를 뜻한다. 일본 규슈·오키나와-대만-필리핀-보르네오 북부 등을 잇는 가상의 방어·전략선이다.)
◇“이란, 美 변화 파악 못하고 있다”
미국이 ‘먼로 독트린’의 시대로 회귀할 경우 질서가 무너질 또 하나의 지역은 유럽이다. 자이한은 이런 이유로 2017년에 나온 책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에서 일찌감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을 예견했다. 자이한은 “나는 지난해 트럼프 2기 출범 후 미국이 나토를 탈퇴하지 않은 것이 놀라웠다”며 “결국 미국이 나토에서 나가지는 않았지만 이는 유럽 국가들이 일제히 위기감을 느끼고 국방비를 증액하게 한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미국의 도움 없이 유럽이 러시아를 막아내려면 이 정도로는 택도 없이 부족하다”고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써 4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이 전쟁은 어떻게 결말이 날까.
“지난 4년 동안 우리는 우크라이나군을 얕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전선에서 우크라이나 전투 드론의 발전 속도는 산업화가 전쟁의 판도를 바꾸기 시작한 1840~1860년대의 변화보다 훨씬 빠르다. 우크라이나군은 상황에 맞춰 드론을 진화시키면서 매달 완전히 새로운 무기 체계를 선보이고 있다. 지금 미군이 상륙해 우크라이나군과 지상에서 맞붙는다면 우크라이나군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러시아에 이기고 있거나, 최소한 러시아에 상당한 고통을 안겨주는 상태다. 문제는 그 고통이 아직은 러시아가 패배할 정도로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와의 인터뷰를 즈음해 지정학적 위험이 끓어오른 또 하나의 지역은 이란이었다. 이란의 핵무기 기술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이란 공습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계속 전해지고 있다. 미국은 이미 중동 지역에 2003년 이라크전 이후 최대 규모의 군사력을 집중시켰다. 이란은 이에 대응해 세계 석유 수송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자이한은 “미국이 이란을 다루는 방식도 과거와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무엇이 바뀌었나.
“이란은 과거와 같은 주요 석유 수출국이 아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 이란이 석유 시장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이를 알아채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이는 미국이 셰일가스 개발을 통해 하루 500만 배럴씩 수출하는, 사실상 세계 최대의 석유 수출국이 되었다는 변화와 연관된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도 세운 적 없는 기록이다. 냉전 이후 미국은 전 세계 해상 운송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자처했는데 그 중심엔 미군과 동맹군이 주둔한 세계 각지에 중동의 석유를 운반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미국의 셰일가스로 계산 방식이 달라졌다. 미국은 전략적·경제적으로 중동 문제에 전처럼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변화가 최근 이란 지역의 긴장 고조와 어떻게 연결되나.
“석유 공급을 차단하겠다는 이란의 위협은 어리석은 협박이다. 내 생각에 이란은 미국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했다. 미국이 이란 정부를 베네수엘라만큼 바로 전복시키기는 쉽지 않겠지만 카르그섬 같은 석유 수출 시설 정도는 간단히 폭파시킬 수 있다. 미국의 전략 변화에 트럼프 특유의 즉각적인 반응까지 더해지면? 미국인의 관점에선 매우 흥미로운, 하지만 이란에겐 재앙적인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너무 많은 대형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트럼프 임기 이후엔 좀 안정될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미국은 중대한 정치적 진화를 거치는 중이다. 민주당은 정당으로서의 역할을 다했고, 공화당은 어느새 트럼프 한 사람의 ‘원맨쇼’ 정당이 되어버렸다. 두 정당 모두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다음 선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은 더 크고 긴 변화의 초입에 막 발을 들여놓았을 뿐이다.”
-얼키고설킨 수많은 사건 가운데, 올해 우리가 주목할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무엇일까.
“‘기술’이다. 전투 드론, 인공지능(AI), 반도체, 신소재 등 현재 미국과 세계가 직면한 거의 모든 문제엔 어떤 식으로든 기술이 연관된다. 그리고 그 기술들이 일제히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앞으로 약 1년 동안 이런 기술이 어떻게 변하는지가 앞으로 10~20년간 미국과 세계가 어떻게 기능할지를 결정할 것이다. 이는 1990년대 디지털 혁명이나 앞서 1800년대 산업 혁명에 견줄 거대한 변화다. 어쩌면 아직은 발명되지 않은,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새 기술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피터 자이한(Peter Zeihan)
미국의 지정학 전략가이자 글로벌 에너지, 인구통계학, 안보 전문가. 호주 주재 미국 국무부에서 근무했으며, 세계 최고의 민간 정보 기업 중 하나인 ‘스트랫포(Stratfor)’에서 분석 담당 부사장으로 일했다. 2012년 자신의 회사인 ‘자이한 지정학 연구소(Zeihan on Geopolitics)’를 설립했다. 전문 지식을 결합한 종합적이고 입체적이며 시원한 분석으로 유명하다.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The Accidental Superpower)’,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The Absent Superpower)’,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Disunited Nations)’ 등 베스트셀러를 썼다.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에서 ‘피터 자이한 인터뷰’ 영상을 보시려면 다음 링크를 복사해서 접속해보세요. https://youtu.be/8XwGjnFXw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