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의균

“현재 세계는 부채를 줄이기 어려운 구조적 변화에 직면한 상태입니다.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부채에 대한 이자 비용 부담이 늘어난 데다, 교역은 둔화되고, 선진국 대부분은 고령화 리스크까지 짊어지고 있습니다. 고령화가 가속화되니 연금, 의료 서비스 비용 등에 더 많은 나랏돈을 투입(의무 지출)해야 해 부채를 줄이기가 과거보다 한층 더 어려워진 상황입니다.”

세계 금융 위기와 부채 위기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 석학으로 꼽히는 카르멘 라인하트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석좌교수는 이처럼 세계 곳곳에 ‘빚의 무게’는 커지는데, 부채를 늘리려는 ‘빚의 유혹’은 더 강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세계은행 수석부총재 겸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냈고, 금융 위기의 역사적 패턴을 분석한 베스트셀러 ‘이번엔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의 공동 저자로 유명한 라인하트 교수는 지난달 26일 본지 WEEKLY BIZ와 TV조선 공동 인터뷰에서 “최근엔 재정적으로 보수적이었던 독일조차 군사비를 더 쓰겠다고 할 정도로 세계 곳곳에 지출 확대 유혹이 커지고 있다”며 “지정학적 갈등에 안보 부담은 커지고, 인공지능(AI) 개발 경쟁과 무역 불확실성까지 겹치다 보니 나랏돈을 ‘더 쓰자’가 당연한 선택지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라고 했다. 상황이 이렇자 올해 2분기 말 기준 전 세계 부채 규모는 337조7000억달러(약 50경원)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국제금융협회)한 상태다. 라인하트 교수는 최근 TV조선이 주최한 글로벌리더스포럼에 기조연설과 대담을 위해 방한했다. WEEKLY BIZ는 2시간 가까이 이어진 라인하트 교수와의 인터뷰를 ‘AI 대도약이란 허상’ ‘한국 부채 문제 진단’ ‘미국 달러 지배력’ ‘중국의 위기’ 등 소주제로 묶어 정리했다.

26일 오후 서울 중구 신라호텔 오키드룸에서 카르멘 라인하트 하버드 케네디스쿨 석좌교수가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11.26 /박성원 기자

◇①AI 대도약이란 허상

-세계 경제에 대한 진단부터 해주시면.

“최근 글로벌 경제는 막대한 불확실성과 극심한 변동성을 보인다. 이는 몇몇 굵직한 흐름이 나타나서다. 우선 꼽을 건 패러다임 변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전반적으로 통합과 세계화의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흐름에 역행하는 분절화가 확산 중이다. 또 다른 흐름은 지정학적 긴장이다. 중국과 관련된 긴장, 러시아와 유럽 사이 갈등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굵직한 흐름이 ‘이번엔 다르다’란 인식과도 밀접한 AI이다.”

라인하트 교수가 공저한 책 제목이기도 한 ‘이번엔 다르다’는, 과거의 패턴을 외면한 채 ‘이번만은 특별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인간의 착각을 꼬집는 말이다.

-AI로 생산성 혁신이 일어나면 글로벌 부채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까.

“AI가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확신할 순 없다. 만약 미리 알았다면 지금쯤 나는 억만장자가 돼 있지 않았을까. 다만 현재 AI를 둘러싸고 나오는 주장 중 상당수는 과거 기술 혁신이 등장했을 때에도 반복적으로 나왔다. AI는 인류사 첫 번째 기술 혁신이 아니다. 1800년부터 225년에 걸친 역사만 봐도 교통 혁명, 철도, 전신, 인터넷 등 세상을 바꾼 혁신의 물결은 수도 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분석 결과 어떤 기술 혁신도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성장 추세선을 크게 뛰어넘는 압도적 성과를 만들진 못했다. 그래서 나는 AI가 생산성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을지 솔직히 상당히 회의적이다. 지금 AI를 둘러싼 기대는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

-‘AI 버블론’에 대한 생각은.

“AI는 복권과 닮았다. 많은 이들이 복권을 사지만, 실제 당첨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지금 AI 분야로 막대한 자금과 투자가 몰리는 것도 모두가 정상에 오르려는 경쟁에서다. 하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기업은 극히 소수에 그칠 것이다. 그만큼 과잉 투자가 나타날 것이고, 그에 못지않은 큰 실망도 뒤따를 것이다. AI 산업엔 분명히 ‘승자 독식’ 구조가 존재한다. 과거 철도 산업을 봐라. 철도는 특히 미국처럼 거대한 국가에서 비즈니스 방식을 완전히 바꾼 혁신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거대한 과잉 투자가 벌어졌다. 수많은 철도 회사가 파산했고, 철도 채권을 산 투자자 상당수는 결국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따라서 지금의 AI 열풍도 경계심을 갖고 바라봐야 한다. 버블은 사후(事後)에야 명확히 보이지만, 사전에 반복되는 특징이 있다. 기초 체력(펀더멘털)과 동떨어진 과도한 가격 상승이 나타나고, 이를 ‘이번엔 다르다’는 자기 최면식 논리가 뒷받침한다.”

◇②韓 가계 부채, 최악엔 ‘은행 위기’까지

-한국의 부채 수준은 어떻게 보나.

“한국의 국가 부채는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그러나 더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가계 부채다. GDP 대비,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 부채 비율 모두 세계에서 높은 편이다. ‘우발 부채’, 즉 금융 위기 이전에는 민간 부채였던 것이 위기 후 공공 부채로 전가되는 위험도 간과할 수 없다. 예컨대 아일랜드와 스페인의 국가 부채는 안정적이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두 나라의 국가 부채 비율은 100% 넘게 치솟았다. 금융기관 구제, 은행 재건(재자본화), 각종 지원 조치에 막대한 재정이 투입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역은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

-한국의 가계 부채가 특별히 우려되는 까닭은.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한국이 빠른 고령화를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앞으로 소득 증가세가 둔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부채 상환에 어려움을 겪을 가계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만약 한국의 가계 부채 문제가 심각해지면 ‘최악의 시나리오’는.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가계들의 연체가 크게 늘어나 비(非)은행 금융사의 건전성이 훼손되고, 일부 은행까지 위험이 전이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최악의 시나리오는 뭘까. 매우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위험은 바로 ‘은행 위기(Banking Crisis)’다. 은행 위기가 실제 터지면 치러야 할 비용이 막대하다. 대부분의 정부는 금융 시스템 붕괴를 용인하지 않기 마련이고, 결국 정부가 금융기관을 살리기 위해 자본을 투입하고 지원에 나서게 되는데, 이는 공공 부채의 급증으로 이어진다. 더구나 은행 위기는 대체로 깊은 경기 침체를 동반한다.”

-급속한 고령화를 겪고 있는 한국에선 공공 부채 비율이 정치적 이슈다. 이재명 정부는 소비 진작을 위해 민생 회복 소비 쿠폰을 지급하기도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일본을 참고하면 좋겠다. 일본은 1990년대 초반부터 수십 년 동안 경기 부양책을 반복해 왔다. 내가 1980년대 초 월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일본이 세계를 장악할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일본에선 주택 시장 거품, 닛케이 버블이 연이어 터졌다. 외부 충격이 아니라 성장 둔화가 극적으로 나타난 데서 비롯된 전형적인 국내발 위기였다. 1990년대 초 이후 일본은 수십 년 동안 ‘성장을 다시 살리겠다’며 부양책을 반복해 왔다. 그러나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는 사회에선 부채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고령층이 많아질수록 의료·복지 지출이 크게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재정 정책을 써야 하나.

“내가 강조하려는 요지는 이렇다. 한 번 부채가 쌓이고 나면 이를 줄이는 일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은 그렇게 부채가 쌓이고 있지만, 최근 대규모 재정 정책은 감세(減稅)가 중심이었다. 성장이 둔화되면 ‘(돈을 풀어) 뭔가 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는 걸 이해한다. 주변을 보면 우리보다 부채 비율이 훨씬 높은 나라들도 있으니 그런 충동이 더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중요하다. 재정 정책은 어디에 돈을 쓸지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중한 선택이 핵심이다.”

그래픽=김현국·Midjourney

◇③달러 지배력, 가장자리 균열 수준

-달러 시스템은 견고하다고 보나.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가 보유한 미국 국채 비중이 꾸준히 감소해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달러 자산 전반의 수요가 줄었다고 보긴 어렵다. 최근엔 되레 달러 자산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예컨대 연준이 발행하는 환매조건부채권(RP), AI 열풍을 타는 미국 주식시장, 미국 기업채 등의 자산군에 상당한 투자금이 계속 유입되고 있다. 그래서 미 재무부가 발행하는 국채만 보면 ‘달러 이탈’로 보일 수 있지만, 달러 자산 전체로 보면 훨씬 더 균형 잡힌 상황이다. 다만 최근엔 ‘달러 헤징(hedging·달러 가치가 변할 때 생길 수 있는 손실을 막기 위해 미리 보호 장치를 걸어두는 것)’ 수요가 크게 늘었다. 시장 참가자들이 그만큼 달러에 대해 더 많은 불확실성을 느끼고 있다는 신호다. 그래서 요컨대 대규모 달러 탈출 사태가 일어나고 있진 않지만, 달러 시스템의 가장자리에 균열이 나타나는 건 분명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왜 이런 균열이 일어나고 있나.

“달러 시스템에 대한 본질적인 우려는 미국의 부채 증가 추세에서 나온다. 미국 의회의 예산국(CBO)은 초당적 기관임에도 ‘현재 부채 궤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진단한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준 의장에게 금리를 낮추라고 공개적으로 압박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물가 안정의 핵심인데, 이런 흐름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내년 5월이면 파월 의장의 임기가 끝나고 새로운 연준 의장이 취임한다. 의장 취임 전에도 연준 내부 인사들이 교체되며 정책의 일관성에 대한 의문 역시 커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시장이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는 미국이 막대한 부채와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돈 풀기(통화 발행)’에 의존할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달러의 안정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 즉, ‘미국의 재정 건전성이 계속 나빠지는 상황에서, 미국 자산이 정말 안전한가’라는 우려가 커지게 될 것이다.”

-최근 스테이블코인이 달러에 미칠 영향은.

“스테이블코인은 기본적으로 미국 국채로 담보돼 있기 때문에 달러 체제를 떠받치는 축이라고 볼 수 있다. 달러 가치 하락에 따라 금이나 가상 화폐 등으로 일부 자산이 움직이는 흐름도 있는데, 가상 화폐 자체는 달러에 큰 도전이 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매우 변동성이 크고 투기적인 성격이 강해서다. 그럼에도 가상 화폐는 실제 거래 수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에 사라질 수 없는 자산군이 됐다고 본다. 가상 자산은 앞으로 달러와 공존하며 가치를 인정받는 자산군으로 남을 것이라 본다.”

◇④또 다른 위기, 중국

-그간 중국의 금융 위기에 대해서도 경고해 오신 걸로 아는데.

“경제적인 관점에서 중국의 가장 큰 리스크는 중국 외부가 아니라 중국 내부에 있다. 중국은 이미 수년째 사실상의 ‘은행 위기’ 국면에 들어가 있다고 본다. 중국 당국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지금 발표되는 부실채권(NPL) 수치는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중국 경제는 최근 수년간 뚜렷한 성장 둔화를 보였고, 여기에 부동산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지방정부 부채도 부동산 개발과 얽혀 있어, 일부 지방정부는 사실상 지급 불능(파산) 상태에 놓여 있다. 지금 중국에서 ‘신규 대출’로 잡히는 금액 상당수도 실제 새 돈이 아니라, 기존 부실을 덮기 위한 ‘에버그리닝(연장·연명 대출)’ 성격이 강하다. 즉,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시간을 벌고 있는 셈이다. 핵심 문제는 손실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이를 회계나 시장 가격에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 은행들은 주기적으로 부실채권을 묶어 매각한다고 발표하지만, 정상적인 시장이라면 이런 상품은 큰 폭의 할인(discount)으로 거래돼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할인 가격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관련 자산이 상당 부분 훼손됐음에도 공식적으로 손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중국발 리스크가 또 있다면.

“중국은 (일대일로 등의 정책을 펴면서) 전 세계 신흥국 등 100국 넘는 나라에 막대한 돈을 빌려주며 해외 대출을 빠르게 늘렸고, 2018년 그 정점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새로 빌려주는 돈보다 되돌려받는 돈이 더 많은 ‘순상환’ 단계로 돌아섰다. (이는 중국이 국내 부동산이나 지방 정부·은행 위기로 신규 대출 여력이 줄었다는 의미일 수 있다.) 또 중국이 여전히 수출 중심 경제에서 벗어나 내수 경제로 전환하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다. 그래서 (미·중 무역 갈등이 불거지자) 중국은 미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개발도상국과 신흥국 시장으로 자국 제품을 대거 밀어내고 있다. 이는 많은 신흥국 정부에 큰 위협이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정책 담당자들을 만나봤더니 중국산 제품이 대량으로 들어오면 자국 제조업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매우 크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