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고조되는 시기에 다자간 무역체제를 떠받치는 WTO(세계무역기구)의 수장이 임기 도중 돌연 사퇴하는 일이 발생했다. 국제기구들이 미·중 힘겨루기를 중재·견제하지 못하고 무기력해진 현실을 드러낸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호베르투 아제베두 WTO 사무총장은 8월 말 물러나겠다고 14일(현지 시각) 특별총회에서 밝혔다. 브라질 국적 직업 외교관 출신으로 2013년 취임한 아제베두는 2017년 연임에 성공해 당초 내년 8월까지가 임기였다. 아제베두는 "개인적 사유로 (사임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이 최근 WTO를 거세게 몰아붙여 왔다는 점에서 압박을 못 견딘 것 아니냐는 관측도 없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아제베두의 사퇴 소식에 "WTO는 끔찍하다. 우리는 아주 나쁜 대우를 받았다. WTO는 중국에 개발도상국 지위를 부여해 이익을 줬다"며 독설을 퍼부었다.

'식물화'된 국제기구는 WTO에 그치지 않는다. 코로나 사태에 전 세계 방역을 주도해야 하는 WHO(세계보건기구)도 미·중 다툼에 끌려다니며 힘을 잃고 있다. WHO는 '친중(親中) 기구'라는 논란에 휩싸여 있다.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WHO 수장이 된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에티오피아 국적)은 중국 감싸기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WHO에 트럼프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지난달 WHO에 대한 미국의 분담금 지급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미·중이 국제기구의 힘을 빼놓는 일은 근년에 가속화되고 있다. 중국은 2018년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 총재로 재임 중이던 자국 출신 멍훙웨이(孟宏偉)를 인터폴 본부가 있는 프랑스에서 본국으로 예고 없이 소환해 부패 혐의가 있다며 구속해버렸다. 국제기구를 우습게 보는 처사라는 비난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