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영 경제부 차장

예전에 일하던 언론사에서 겪은 일이다. 위안부 할머니 지원 단체가 사진 자료 열람을 요청해 왔다. 이들은 사진 캐비닛을 뒤져 몇 장을 고르더니 이를 빌려가 홍보 책자에 싣겠다고 했다. 그런데 비용 얘기가 나오자 화를 냈다. "할머니들을 위한 일인데 돈을 받겠다니"라고 했다. 좋은 일 한다는 자부심 때문일까. 공익(公益)법인 관계자 중에 돈 문제엔 느슨해도 된다고 여기는 이들을 적잖이 보았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지난주 기자회견이 촉발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부실 회계 문제에 대해서도 정의연은 비슷한 태도로 대처하고 있다. '우리는 힘들게 일한다. 그깟 회계 고치면 되지 웬 유난인가'라는 식이다.

이들은 "공익법인에 어찌 기업과 같은 수준의 회계를 요구하는가"라고 한다. 회계 전문가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공익법인 회계는 기업과 같을 수 없다고 했다. 오히려 훨씬 더 정직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홍익대 경영대 윤재원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공익법인은 대중에게 기부금을 모집할 수 있고 정부로부터는 세금을 면제받습니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시민과 정부의 돈을 받습니다. 따라서 공익법인이 일반 대중에게 기부금이 목적대로 쓰이는지를 회계 공시를 통해 투명하게 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기부자는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아야 하고 정부는 면세 혜택을 유지할지를 확인해야 하니까요. 돈을 제대로 쓰지 않는다면 사회 전체를 속이는 것이 됩니다."

공익법인 기부자들은 그 돈이 단체가 내세우는 '좋은 일'에 쓰이기를 바란다. 최중경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의 표현을 빌리면 "고상한 커미트먼트(헌신)"다. 배원기 홍익대 경영대 교수는 "기업은 직원과 주주가 이해관계자라면, 비영리단체는 돈을 내는 기부자들이 이해관계자이다. 내세운 목적대로 돈을 썼는지를 알리는 투명한 회계는 기부자와 사회에 대한 의무"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정의연 회계 공시는 한마디로 엉터리다. 금액·용처 등을 수도 없이 틀리게 적었다. 예컨대 지난해 '기부금품 지출 명세서' 중 전체 지출의 62%(4억6900만원)를 차지하는 맨 마지막 내역이 이렇다. '지급처 명: 기타, 수혜 인원: 9999명.' 만약 어떤 스타트업이 이런 서류를 들고 100만원이라도 투자받으러 갔다면 쫓겨났을 게 뻔하다.

미국은 국세청이 공익법인 회계 공시를 감시한다. 부실한 회계엔 벌금도 만만찮게 물린다. 한국은 공익법인 회계에 너그럽다. 제대로 책임지는 부처가 없다. 국세청이 공시는 담당하지만 법인별로 주무 부처가 따로 있고 회계 공시 양식 자체는 또 기획재정부 소관이다. 한 회계사는 "한국 시민 단체는 목소리가 커서 공무원들이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정부 여력이 부족하면 외부 감사 제도라도 활용할 법한데, 그마저도 헐렁하다. 미국은 통상 공익법인의 연간 총수입이 25만~50만달러(약 3억~6억원, 주별로 차이)만 넘어도 외부 감사를 받아야 한다. 한국은 50억원 미만이면 면제된다. 작년까지 공익법인 절반 이상이 외부 감사를 면제받았다. 이런 사각지대에서 기부자들의 돈은 위험에 빠진다.

정의연 회계 문제를 지적하면 '친일 보수 세력의 모함'이라고 몰아붙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회계처럼 비(非)정치적인 분야도 드물다. 고려대 경영대 이한상 교수의 말마따나 "회계엔 내 편 네 편이 없다." 조기축구회서부터 삼성전자까지 원칙은 같다. 정직하고 투명해야 한다. 기업 부실 회계는 투자자 지갑을 털어간다. 공익재단의 엉터리 회계는 사회의 선의(善意)를 잡아먹는다. 친일·반일 따질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