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용지는 종이로 만든 총알이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고양정)와 일산동구(고양병)를 아우르는 ‘일산 벨트’가 4·15 총선 격전지를 예약했다. 현역 의원인 김현미(왼쪽) 국토교통부 장관과 유은혜 교육부 장관이 지난달 3일 나란히 불출마를 선언하며 무주공산이 됐기 때문이다.

2010년 6월 지방선거를 며칠 앞둔 5월 말 경기 고양시 일산문화공원 유세 현장. 노란 점퍼를 입은 경기지사 야권 단일 후보 유시민은 이미 목이 쉬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국민의 뜻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안 남았습니다. 뭡니까?” 그가 물었다. “투표요!”라고 군중이 외쳤다. 이 함성과 박수에 후보가 화답했다.

"우리가 손에 들게 될 투표용지는 종이로 만들어진 총알입니다. 종이로 만든 총알, 이 투표용지로 이명박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과 무능을 심판합시다. 여러분!"

그해 경기지사를 놓고 한나라당 김문수, 진보신당 심상정, 국민참여당 유시민 등 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을 한 서울대 선후배들이 맞붙었다. 심상정은 중도에 사퇴하며 유시민을 밀었다. 승자는 김문수(득표율 52.20%). 쓴맛을 본 유시민은 결국 2013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투표용지=총알'이라는 수사(修辭)는 살아남았다.

올해 4·15 총선을 앞두고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특히 고양시 일산동구(고양병)와 일산서구(고양정), 이른바 '일산 벨트'가 일찌감치 수도권 격전지로 떠올랐다. 현역 의원인 유은혜 교육부 장관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무주공산이 됐기 때문이다. '못살겠다 갈아엎자.' 주엽역 앞 사거리에 나도은 자유한국당 예비 후보(고양정)가 내건 현수막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전략 공천 카드를 궁리 중이다. 이상성 민주당 예비 후보(고양병)는 "일산은 낙하산 훈련장이 아니다"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사수냐 탈환이냐

고양시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엎치락뒤치락 주인이 바뀐다. 6·25전쟁 막바지 동부 전선 최전방을 그린 영화 '고지전(高地戰)'처럼 말이다. 2008년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은 네 선거구(고양 갑·을·병·정)를 휩쓸었다. 그러나 2010년 지방선거를 끝으로 전황이 역전됐다.

2012년 총선에선 통합진보당 심상정(고양갑)과 민주통합당 유은혜(고양병)·김현미(고양정)가 고지를 빼앗았다. 보수 텃밭에서 진보로 흙을 뒤집어엎은 셈이다. 새누리당 김태원(고양을)만이 방어에 성공했다. 2016년 총선에선 정의당 심상정, 더불어민주당 정재호·유은혜·김현미 등 좌파 후보들이 석권하며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로부터 4년. 풍향이 다시 바뀔 조짐이다. 지난해 5월 창릉 3기 신도시 발표가 방아쇠가 됐다. 1기 신도시인 일산과 2기 신도시인 파주 운정 주민들이 격노했다. 안 그래도 일산은 같은 1기 신도시인 경기도 분당과 비교하면 집값이 절반을 밑돈다. 그런데 서울과 일산 사이 고양 창릉에 3만8000호를 짓는다고? 민심이 돌아설 만한 충격이었다.

회원이 1만여 명인 일산연합회는 3기 신도시 발표 직후부터 반대 집회와 서명운동을 해왔다. 이현영 일산연합회 회장은 "김현미 장관은 '가장 저항이 없을 곳이라 창릉으로 지정했다'고 하는데 일산 주민을 호구로 아느냐"며 "민주당을 '미워도 다시 한 번' 식으로 지지해오다 배신감을 느꼈다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현재는 고양시장과 시의회, 현역 의원을 민주당이 점령하고 있지만 앞으론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고양시 인구는 106만여 명이다. 서울과 광역시들을 빼면 전국에서 수원시 다음으로 많다. 고양종합터미널 시외·고속버스 시간표를 보면 이곳 사람들의 지역적 배경을 가늠할 수 있다. 매일 천안으로 13회, 대전으로 12회 운행한다. 광주(光州)와 전주는 각각 9회, 군산은 6회다. 인구가 훨씬 더 많은 부산은 하루 8회, 대구는 6회에 불과하다. 일산서구 주민 최모(65)씨는 "전라도 사람들은 모여 사는 특징이 있는데 고양시엔 30%가 넘는다"며 "여론은 민주당에 부정적이지만 호남향우회 등 조직이 탄탄해 승패는 투표함을 열어봐야 알 일"이라고 했다.

악화된 민심, 전략 공천 향방은

'비정규직 철폐! 우리가 이긴다' '1500명 해고 주범인 김현미를 파면하라' '사랑하는 가족 보고 싶다. 이제는 끝장내자'….

지난 29일 일산서구 태영프라자 4층 김현미 의원 사무실 앞은 어지러웠다. 민주노총 소속 요금 수납원들이 "자회사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도로공사 방침에 반발해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투쟁 중이다. 사무실 내부도 벽마다 집회 구호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바닥에는 침낭도 여럿 보였다. "국토교통부 장관실도 아닌데, 지역 현안을 전하고 싶어도 들어갈 엄두가 안 난다"고 일산 주민들은 말한다.

지난 1월 3일 고양시청 체육관에서는 이 지역 정치인과 기관장, 원로가 모이는 신년 교례회가 열렸다. 헤드 테이블에는 심상정 의원과 한국당 비례대표 김현아 의원, 고양을 출마를 선언한 최성 전 고양시장 등이 앉았다. 이 시각 국회에서는 김현미·유은혜 장관이 총선 불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일산 벨트를 전략 공천 지역으로 선정했다. 최근 고민정 전 청와대 대변인, 한준호 전 청와대 행정관,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등을 후보로 이 지역 인지도 조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승태 사법 농단' 의혹을 폭로한 이수진 전 수원지법 부장판사도 거명된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이상성 예비 후보는 "지역 일꾼을 뽑는 선거에 다른 지역 사람(낙하산)을 내려보내는 것은 일산 주민 모독"이라며 반대 목소리를 냈다.

1월 중순 민주당에 또 악재가 터졌다. 김현미 의원이 일산서구청에서 열린 신년 행사에 참석했다가 "동네 물이 나빠졌다"고 말한 사실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3기 신도시 계획에 반발하는 주민에게 "일산 민심 안 망가졌다"고 했다가, 항의가 이어지자 "그동안 동네 물이 많이 나빠졌네. 그렇죠?"라고 받아쳐 일어난 설화(舌禍)였다. 일산동구는 마두동 학원가를 중심으로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도 잠재돼 있다는 평이다.

한국당은 3기 신도시 건설 전면 재검토를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주거 정책 전문가인 김현아 의원은 김현미 의원 사무실 건너편에 최근 사무실을 열었다. 일산을 이대로 두면 '공급 폭탄'의 파편을 맞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지난 8년 동안 이 지역 의원들의 교통(서울 접근성) 관련 공약은 GTX를 빼곤 실행된 게 없다. 창릉 3기 신도시 조성은 무분별한 공급 폭탄이다. 죄 없는 일산 주민들이 그 파편에 다칠 테고, 일산은 낙후한 섬처럼 뚝 떨어져 나갈 것이다."

정권 심판 vs 야권 심판

1988년 이후 총선에서 집권당이 과반 의석을 가져간 경우는 세 번밖에 없다. 그만큼 정권 심판론이 강하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요즘 여당이 아무리 '야권 심판론'이라는 말을 만들어도 총선은 본질적으로 정권 심판"이라며 "집권 후 잘했다면 유권자가 지지할 테고 못했다면 응징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열린 창원 성산 보궐선거가 가늠자가 될 수 있다. 당시 민주당과 단일화를 이룬 여영국 정의당 후보는 강기윤 한국당 후보를 504표 차로 간신히 꺾었다. 고(故) 노회찬 의원의 지역구였지만 탈원전 등으로 산업 기반이 무너지자 노동자들조차 이 정권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호주머니를 두툼하게 해줄 후보를 고르는 '포켓 밸류 보팅(pocket value voting)'을 할 것으로 김 교수는 전망했다.

"일산 주민들이 그동안 좌파 후보를 지지한 것은 도덕성과 개혁성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는데, 이젠 실망이 커지면서 초박빙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일산은 4·15 총선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민주당은 더 중량감 있고 검증된 인물을 투입해 '경제 응징 투표'라는 대세를 바꿔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고양종합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 장모(73)씨는 "정치에 관심을 끊었다"고 했다. "일산 유권자들이 지난 총선 두 번에서 민주당 후보를 뽑아줬는데 3기 신도시로 뒤통수를 맞았다"며 "자기 잇속이나 챙기고 꼴불견이라 화가 난다.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는 야당도 한심하다"고 혀를 찼다. 그래도 반드시 투표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부동층의 표심을 저격하는 정당이 승리할 것이다. 총알은 이미 장전됐다.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두 달 반 남았다.

고양시 일산서구 주엽역 근처에 있는 국회의원 김현미 사무소. 민주노총 소속 요금 수납원들의 투쟁 구호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1기 신도시 30년… 일산·분당 희비교차

일산, 기업유치 안돼 베드타운化

정부는 1989년 폭등하는 집값을 잡으려고 수도권에 1기 신도시 계획을 추진했다. 분당과 일산이 대표적이다. 지어진 지 30년 가까이 흘렀지만 결과는 판이했다. 서울 도심, 특히 강남권 접근성이 좋은 분당 집값은 계속 올랐다. 이젠 일산 집값과의 차이가 2배를 넘는다. 일산은 광역교통망도 제대로 확충되지 않고 기업 유치도 이뤄지지 않아 베드타운으로 전락했다.

지난해 5월 국토교통부가 3기 신도시 계획을 발표하자 일산은 다시 직격탄을 맞았다. 주민들 사이에 "창릉이 일산보다 서울에 더 가까워 일산 집값은 사망선고를 받았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서울 집값을 잡는데 왜 1~2기 신도시 주민이 희생해야 하느냐는 울분도 있다. 일산 주민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에는 교통과 일자리 문제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분석이다.

핵심은 역시 집값이다. 부동산뱅크에 따르면 분당 신도시 서현동 삼성한신 아파트(107㎡)는 1991년 9월 입주할 때 1억5000만원이었다. 현재 평균 매매가는 10억7000만원. 반면 1992년 10월 입주할 때 1억2000만원 하던 일산 신도시 강촌마을 강촌동아 아파트(105㎡)는 현재 평균 4억4000만원에 거래된다.

일산 마두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창릉 신도시 발표 직후 급매물이 좀 쏟아져 나왔지만 신도시 입주는 5~6년 뒤의 일이라 이젠 회복됐다”면서 “정권이 바뀌면 변수가 생길 거라는 기대감도 있다”고 말했다. 일산서구 주민 정모(43)씨는 “경기도 너무 안 좋고 유권자들 민심이 돌아서 이번 총선에선 여당을 심판하겠다고 이를 갈고 있다”며 “민주당이 거물급을 전략 공천해도 일산에서는 이기기 어려운 싸움”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