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 reap 이란 단어가 있다. r, e, a, p, 립, 동사다. 작물을 수확하다, 거두다, 이런 뜻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날카로운 도구를 써서 곡식을 베어들이다, 이런 뜻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베어들이다’라는 부분이다. 잘 익은 낟알이 들어있는 곡물의 목 부분을 낫으로 치는 행위다. 이 동사를 명사형으로 써서 reaper, r, e, a, p, e, r, ‘리퍼’가 되면, 즉 베어 들이는 사람, 베어 들이는 기계, 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를 대문자로 쓰면, 즉 Reaper 라고 쓰면 ‘죽음의 신(神)’이란 뜻이 된다. 해골 모습에 망토를 걸치고 큰 낫을 든 가상적 존재를 말한다. 영어에 grim 이란 단어가 있는데 ‘무자비한’ 이란 뜻이다. 그래서 ‘죽음의 신’을 ‘그림 리퍼(Grim Reaper)라고도 한다. 우리말로 적절히 옮기면 ‘저승사자’란 뜻이다. ‘리퍼’는 ‘저승사자’다.

미군이 지난 3일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을 제거했을 때 사용한 무기가 바로 무인공격기, 드론, ‘MQ-9 리퍼’다. 다른 무인 공격기도 있는데, 이름이 ‘프레데터’다. 이것은 약탈자, 포식자, 그런 뜻이다. 무인공격기들의 이름은 무시무시하다. 그런데 ‘리퍼’가 그중 가장 험악하고 살벌한 표현이다. ‘죽음의 신’ ‘저승사자’다. 이 ‘리퍼’라는 단어 속에 미군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이 드러난다. ‘전략적 인내’라는 말이 함축하듯 미국은 끝까지 인내심을 갖고 협상으로 외교 분쟁을 해결하려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일단 미국인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면 상대를 끝까지 섬멸하려는 의지를 숨기지 않는다. 무서운 나라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전쟁을 멈춰본 적이 없는 유일한 나라다. 미국은 전쟁을 가장 잘하는 나라다.

이란은 "2015년7월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독일 등 6개국과 체결한 핵합의, JCPOA, 즉 포괄적 공동행동계획, 이 규정을 준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미국이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폭살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전격적인 핵개발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한 장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이란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와 에브라힘 라이사 사법부 수장이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보여주었다. 솔레이마니의 미망인은 "누가 내 남편을 위해 보복을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란에도 반정부 세력이 있는데, 이 반정부 세력까지도 하나로 뭉치고 있다. 솔레이마니 후계자인 에스마일 가니 장군은 "중동에서 미국을 몰아내겠다"고 다짐하고 있고, 모흐센 레자에이 전 이란 혁명수비대장은 "미국이 반격하면 이스라엘의 하이파와 텔아비브는 가루가 될 것"이라고 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우릴 공격하면 무차별 보복하겠다"고 했다.

세계 언론들은 ‘중동에 전운(戰雲)이 감돈다’, ‘핵 위기가 다시 몰아치고 있다’고 했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70달러를 돌파하면서 치솟고 있고, 국제 정세가 불안정할 때마다 뛰어오르는 안전 자산 금값은 6년8개월 만에 최고치인 온스 당 1588원 선을 기록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중동의 전운’이 완전히 가신 적은 없다. ‘중동의 화약고’는 항상 긴장 상태였다. 이스라엘이 비공식적으로 85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마당에 이란이 핵개발 야망을 완전히 포기할 것으로 믿는 군사전문가도 없었다. 이란의 핵 포기를 뜻하는 6개국 핵합의, JCPOA, 이것이 출범했을 때부터 그 진정성을 믿거나 끝까지 지켜질 것이라고 믿는 전략가도 없었다. 미봉책이라는 생각이 많았고, 이 핵합의를 먼저 깬 것은 사실은 미국이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을 항상 의심했고 진짜로 핵을 포기했다고 믿은 적이 없다.

이란과 북한은 40년 동안 핵과 미사일 분야에서 협력을 이어오고 있다. 두 나라는 핵을 포기할 것처럼 여러 차례 약속을 했지만, 진정성이 약하거나 국제사회의 궁극적인 신뢰를 얻지 못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진행돼 왔다. 2019년 기준 세계 핵탄두 보유량은 러시아가 6500기, 미국이 6185기, 프랑스 300기, 중국 290기, 영국 200기, 파키스탄 155기, 인도 135기, 이스라엘 85기, 북한 25기 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핵 전문가들은 미국의 핵확산 금지 전략은 실패했다고 보고 있다. 미·러·불·영·중, 다섯 개 상임이사국의 울타리 안에 핵무기를 가둬 놓겠다는 핵확산금지조약 NPT는 이제 50년이 됐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왜냐하면 파키스탄, 인도,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핵보유국 대접을 받아왔고, 이제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 행세를 하고 있으며 이란도 핵개발을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길게 보면, 지금은 ‘핵 군축’ 시기에 있는 게 아니라, ‘핵 군비 증강’ 시기에 있다고 봐야 옳다. 2008년 세계 핵탄두 보유량이 2만5000기였는데, 작년에 1만4000기로 줄었으니 핵 감축 아니냐고 보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탄두 수는 줄었지만, 핵 능력은 훨씬 고도화·정밀화됐고, 핵 무장을 고려하는 나라는 앞으로 불어날 것으로 봐야 옳다. 핵탄두로만 따지면 미국이 6185기, 북한 25기, 물론 추정치인데, 숫자로만 보면 미국이 북한의 250배다. 아니 정밀도나 파괴력을 따지면 2500배쯤 될지 모른다. 그러나 핵무기는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있고 없음’이 중요하다. 북한 핵 탄두 25기가 동시에 날아오면 100% 요격은 불가능하다. 요격을 피해 우리 땅에 떨어지는 한 발의 핵탄두가 문제인 것이다. 북한은 그래서 "우리는 잃을 게 없다"고 협박하고 있다.

전북 군산에 있는 미 공군 기지에도 무인공격기 ‘그레이 이글’ 12대가 배치돼 있다. 최근에는 ‘저승사자’ ‘죽음의 신’ 리퍼 무인공격기까지 한반도에 배치됐다는 추정 뉴스가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은재 국회 정보위 한국당 간사는 국정원이 북한이 ‘핵개발 포기’와 ‘경제제재 해제’를 교환하는 비핵화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국정원이 "북, 핵 포기 불가"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물론 여당이나 국정원에서 부분적으로 부인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문재인 정권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기 어려울 것이란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본다.

이제 이란이 핵개발을 노골적으로 서두르면 사우디아라비아도 대응 핵개발에 나설 것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게 기정 사실로 굳어지면, 한국과 일본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될 것이다. 아니 일본에서는 비밀리에 이미 준비 작업을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만도 들썩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핵 군축 시기가 아니다. 지역적인 국면에서는 냉전시대보다 무섭고 어려운 제2차 핵 증강 시기에 돌입해 있다. 순진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런데 이날, 이런 어지러운 국제 정세 속에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김정은 답방 여건 갖춰지도록 남북 함께 협력해야", "끊임없는 대화용의...개성공단·금강산 재개 노력" "비무장지대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동 등재 북한 호응 바란다" "도쿄올림픽 남북 공동입장 단일팀 협의 계속하자" 같은 말을 쏟아놓고 있다.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유튜브 ‘김광일의 입’, 상단 화면을 눌러 감상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