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안병현

연도(年度) 맨 앞자리가 바뀐 지 20년이 흘렀다. 2000년 출생자부터는 주민번호 일곱째 자리도 달라졌다. 남성은 1에서 3으로, 여성은 2에서 4로. 2000년에 태어난 밀레니엄 베이비가 성인이 되는 동안 1인당 국민소득은 3배 가까이 늘어 3만달러를 넘어섰다.

"사람은 안 변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물리도록 듣는 말이다. 학벌이나 직업, 집이나 재산 등 외적 조건이 아무리 달라져도 사람 성격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의아하다면 동창 모임에 가볼 일이다.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성격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스무 살이 넘으면 그 사람 일생 동안 잘 변하지 않고 지속된다"고 했다.

30~60대 남녀 4029명에게 물었다. 20년 전 당신과 지금 당신은 성격이 얼마나 달라졌느냐고. 말하자면 셀프 리포트(self-report·자기 보고)다. SM C&C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의뢰해 12월 말 진행한 이 설문조사는 결과가 꽤 뜻밖이었다. '20년 전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응답이 1322명(33%)이나 됐기 때문이다.

3명 중 1명 '성격 완전히 변해'

응답자들에게는 문항마다 1(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부터 5(완전히 달라졌다)까지 척도를 제시했다.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응답이 33%로 으뜸이었다. '달라진 편이다' 20% '비슷하다' 21% '달라지지 않은 편이다' 25%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1%였다. '완전히 달라졌다'와 '달라진 편이다'를 합하면 53%. 100명 중 53명이 "20년 전 나와 지금 나는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한 셈이다. 불굴의 한국인은 마침내 성격마저 뜯어고칠 수 있게 된 것일까. '완전히 달라졌다'는 응답률은 30대 여성(37%)이 가장 높았고 60대 여성(29%)이 가장 낮았다.

사람들은 20년 전에 존경한 멘토를 지금도 우러러볼까. '완전히 달라졌다'가 37% '달라진 편이다'가 15%로 나타났다. 100명 가운데 52명은 옛 멘토에 대한 존경을 거두고 새 멘토로 갈아탄 것이다.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3%에 그쳤다. 한국 사회에서 멘토의 수명은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 유통기한보다 짧을지도 모른다. 특히 40대 여성은 43%나 '멘토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답했다.

문화적 취향도 세월에 침식되고 무너지는지 궁금했다.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가 20년 사이 얼마나 변했는지 묻자 '완전히 달라졌다'가 40%를 점령했다. '비슷하다'(25%) '달라지지 않은 편이다'(19%) 순이었다. 연령대가 낮을수록 '완전히 달라졌다'는 응답이 많았지만, 문화적 취향이 가장 급변한 집단은 40대 여성(45%)으로 조사됐다.

그렇다면 정치적 성향도 뒤집혔을까. '완전히 달라졌다'가 36% '달라진 편이다'가 15%였다. 반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6% '달라지지 않은 편이다'는 18%로 나타났다. 지난 20년 동안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를 지나면서 꽤 많은 유권자가 좌(左)에서 우(右)로, 또는 우에서 좌로 건너간 셈이다. 중도에서 출발해 어느 쪽 끝으로 갔거나 그 반대도 있을 테지만.

'남이 보는 나'는 또 다르다

일러스트=안병현

이번 설문조사 결과는 '사람은 변하기 어렵다'는 정설과는 딴판이다. 내성적이던 사람이 외향적으로 바뀌거나 외향적이던 사람이 내성적으로 바뀐 것일까. 자기 계발 시대라지만 그렇게 단정할 순 없다. SM C&C 김민정 부장은 "직장에서 일하며 어떤 책임을 맡고 연차도 쌓이면서 성격이 좀 달라졌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며 "진짜 성격이 아니라 '대외적인 성격'이 바뀐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리(직위)가 사람을 만든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내가 보는 나'는 성격이 달라진 것 같아도 '남이 보는 나'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둘 사이엔 격차가 있다. 회사원 김영훈(47)씨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20여 년 만에 동창회에 나가 보니 어릴 적 말 많던 친구는 지금도 수다스럽고 과묵하던 친구는 여전히 말수가 적다"며 "대부분은 성격이 변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좀 서먹해도 사회생활 하며 한 꺼풀 가려 있던 원래 모습이 곧 나타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일터에서 대체로 원만하고 쾌활한 가면을 쓴다. 피로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서야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다. 워킹맘 오지은(42)씨는 "직장에서는 내 성격 중에 내가 싫어하는 측면이 덜 드러나도록 사회적으로 통제한다. 나를 감추는 식"이라며 "또 결혼과 육아 등을 경험하고 보니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젊었을 적 고정관념,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많은 40대 여성이 '2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응답한 까닭도 이 맥락으로 읽힌다.

베스트셀러에는 그 시대의 욕망이 담겨 있다. 교보문고가 최근 발표한 10년치(2010~2019년) 베스트셀러에서 '미움받을 용기'가 4위 '82년생 김지영'이 8위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가 9위에 이름을 올렸다. "남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는 책들이다. 일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가 아들러(Adler) 심리학을 쉽게 풀어 쓴 '미움받을 용기'는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독자의 등을 떠민다.

성격이 바뀌었다는 착각

누구는 밖으로 쏘다녀야 활력이 생기고 누구는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얻는다. 외향성과 내향성은 이렇게 뚜렷하게 갈린다.

진화심리학자 전중환 경희대 교수는 "이번 설문조사는 '타인이 보는 나' 없이 셀프 리포트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성격을 진화적으로 보면 '자신에게 유리한 행동 방식'이다. 언뜻 생각하면 외향적인 사람이 리더도 되고 번식에 유리할 것 같지만, 내성적인 사람과 달리 위험한 행동을 하다 다치거나 죽기도 한다. 성격은 또 유전성이 강해 바뀌는 일이 거의 없다."

성격이 타고난 유전자(DNA)로 결정되는지 성장 환경에 따라 바뀌는지는 쌍생아 연구로 가늠할 수 있다. 유전자를 100% 공유하는 일란성쌍둥이를 환경이 완전히 다른 가정에 따로 입양시켜 연구하는 식이다. 각각 엄격한 양부모와 너그러운 양부모 아래서 자랐을 경우, 양부모의 성격이나 양육 방식이 일란성쌍둥이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 것으로 확인됐다. 전 교수는 "한 집에서 자란 형제라 해도 성격 형성은 유전자가 50%, 비공유 환경(출생 순서와 교우 관계 등)이 45%, 공유 환경(양육 방식과 가정 환경 등)이 5%쯤 영향을 준다는 연구가 있다"고 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마지막 문항은 이랬다. 배우자 등 가족을 변화시키는 것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과 비교해 어떤가? '훨씬 더 어렵다'가 31%, '어려운 편이다'가 30%였다. '훨씬 더 쉽다'는 0%로 나타났다. '훨씬 더 어렵다'는 응답은 30대 여성(35%)에게서 가장 많았다. 자신을 바꾸기도 버거운데 남을 변화시키려다 갈등을 겪은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 등 주변 사람 성격을 바꾸려 하지 말고 그의 관점을 이해하려고 하면 조화할 길이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특히 부부를 향해 이렇게 조언했다.

"우리는 자신이 힘겨워하는 일을 척척 해내는 사람에게 끌린다. 결혼하면 그 장점이 실망스러운 것으로 바뀐다. 이를테면 가사 능력은 정리 정돈 강박증처럼 보일 수 있다. 서로의 차이에 끌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최적 배우자는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견 충돌과 차이를 조율할 줄 아는 사람이다."

아카데미상에 도전하는 봉준호 영화 '기생충' 식으로 말하자면 "(성격에 관한 한) 가장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다. 성격은 생각대로 바뀌지 않는다. 더욱이 남의 성격은 건드리는 게 아니다. 고치려다 부러진다.

공적인 삶, 개인의 삶… 그리고 비밀의 삶 같은 사람도 장소 따라 성격 변모

진화생물학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적합한 성격이 있다고 설명한다.

'거피'라는 열대어가 있다. 어떤 거피는 포식자가 없는 강 상류에 살고 어떤 거피는 포식자가 득실대는 하류에 산다. 하류에서는 거피 몇 마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포식 물고기에게 다가가 정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거피는 대부분 소심해 무리를 지어 다닌다.

대담한 거피는 목숨을 건 만큼 이득을 얻는다. 먹이가 있는 장소를 더 잘 찾아내고 짝짓기에도 유리하다. '진화한 마음'을 쓴 전중환 교수는 "결국 포식자가 없는 상류에서는 대담한 성향이, 포식자가 많은 하류에선 소심한 성향이 최적값"이라며 "이것이 거피 개체군에서 대담함 또는 소심함이라는 성격상 변이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이유"라고 했다.

사람이 외향적이면 접촉이나 성관계로 전염병에 걸릴 위험이 커진다. 여름이 덥고 습해서 과거에 전염병이 창궐한 지역일수록 외향성은 득보다 실이 더 클 것이다. 그런 곳에선 낯선 사람을 만나기보다 집에 머무는 편이 낫다. 세계 71국을 대상으로 전염병 병원균의 득세 수준과 각국의 외향성·내향성 빈도를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동아시아나 아프리카처럼 전염병이 많던 국가일수록 국민이 더 내향적이었다.

같은 사람도 장소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사람은 누구나 세 삶을 산다. 공적인 삶, 개인의 삶 그리고 비밀의 삶"이라는 영화 '완벽한 타인' 속 대사처럼. 30년 지기 친구들이 부부 동반으로 모이는데 누군가 묘한 게임을 제안한다. 모두 휴대전화를 식탁에 올려두고 통화와 문자, 이메일과 카톡까지 다 공개할 것. 배우자나 친구가 숨기고 있던 충격적 진실이 잇따라 드러난다.

부부나 친구도 완벽한 타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직장에서는 말해 무엇 하나. 사무실 옆자리에 앉은 명랑한 동료가 속을 새까맣게 태우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