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선박용 공기 압축기 제조업체를 경영하는 로랑 브롱스키씨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팬이다. 브롱스키씨는 기자에게 "마크롱이 강성 노조와 싸우며 이뤄내는 개혁이 반갑다"며 "중소기업 경영자의 고충을 이해하는 대통령"이라고 했다.
'유럽의 병자(病者)'로 불리며 쇠락하던 프랑스가 변하고 있다. 2017년 5월 취임한 마크롱의 5년 임기가 반환점을 맞이한 가운데 사회 곳곳에서 활기가 완연하다. 마크롱이 취임한 2017년 2분기 9.5%였던 프랑스 실업률은 올해 2분기에 8.5%로 떨어졌다. 11년 만에 최저치다. 최근 2년 사이 실업자는 29만명 감소했다. 스타트업 창업 바람이 불면서 지난해 신설 기업(법인)이 69만개로 재작년보다 17% 급증한 덕분이다.
IMF(국제통화기금)는 올해 경제성장률을 전망하며 프랑스는 1.2%로 선방할 것으로 보는 반면, 독일은 0.5%에 그칠 것으로 내다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낮은 성장률과 높은 실업률에 허우적대던 프랑스가 독일을 제치고 경제 모범국이 되고 있다"고 했다. 여론조사 기관 해리스 인터랙티브 조사에서 마크롱 지지율은 '노란 조끼' 시위가 한창이던 작년 12월 31%였지만 올해 9월에는 42%까지 회복했다. 마크롱이 어떻게 개혁을 이뤄내는지 비결을 들여다보고 리더십의 요체를 살펴본다.
①200분 '스탠딩 토론'의 대화 정치
지난달 3일 마크롱은 로데즈라는 남부 소도시에 갔다.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하자 고령자가 많은 도시를 찾아 국민을 설득하는 토론을 열기 위해서였다. 토론장 좌석 배치가 범상치 않았다. 500여 명의 참석자가 가운데 선 마크롱을 향해 360도 빙 둘러서 앉았다. 마크롱은 숨을 곳도 없고 대본을 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마이크를 쥐고 한가운데 서서 즉석에서 질문을 받고 대답했다. 이날 '스탠딩 토론'은 저녁 7시부터 10시 20분까지 200분 동안 쉼 없이 진행됐다. 강한 체력도 필요하고 정책을 꿰고 있어야만 가능한 방식이다.
마크롱의 연금 개혁은 62세인 정년을 64세로 올려 첫 연금 수령 시기를 늦추는 것이 핵심이다. 연금 수령액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거센 반대를 마크롱은 소통으로 정면 돌파한다. 연금 개혁 전용 홈페이지를 만들어 모든 질문에 정부 담당자가 하나하나 답을 달게 했다. 별도로 연금 개혁을 전담하는 특임 장관을 임명해 전국을 돌며 국민을 만나게 했다.
앞서 '노란 조끼' 시위의 해결책도 대화였다. 그는 올해 초 3개월간 전국을 돌며 '국가 대토론(Le Grand Débat national)'을 열어 평범한 이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1월 노르망디에서 열린 첫 대토론에서 6시간 동안 자리를 지켰다. 지난달 뉴스채널 BFM 여론조사에서 연금 개혁에 대해 반대 43%, 찬성 32%, 판단 유보 24%의 결과가 나왔다. 국민 모두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정책치고는 찬성이 제법 많다는 평가가 나왔다.
②우선순위 골라 전광석화식 개혁
마크롱은 개혁의 우선순위를 정해 순서대로 실행한다. 1차 목표는 노동 개혁이었다. 지나치게 해고가 어려워 고용주들이 일자리 늘리기를 주저하는 것부터 깨뜨려야 한다고 봤다.
취임 9일째를 맞은 날 마크롱은 CFDT (민주노동동맹) 등 주요 8개 노동단체 수장을 엘리제궁으로 불렀다. 8명을 한 시간씩 일대일로 모두 8시간 면담하며 노동 개혁 방향을 설명했다. 이외에도 총리·장관까지 정부 측에서 모두 4개월간 100차례에 노동 단체들을 만났다. 충분한 공론화가 이뤄지자 의회 표결을 하지 않고 긴급 행정명령으로 주요 노동개혁 조치를 즉시 발효시켰다. 속전속결이었다. 부당 해고 배상금 상한선을 처음 만들어 어떤 경우에도 20개월치 월급을 넘지 못하게 했다. 예전에는 한도가 없어 기업이 직원 몇 사람을 내보내고 파산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50인 이하 기업은 임금과 근로조건을 산별(産別) 노조가 아닌 개별 기업 노조가 협상할 수 있게 바꿨다. 노동단체 힘이 꺾이고, 중소기업에 숨통이 트였다.
마크롱은 2년 차를 맞은 지난해에는 역대 정권이 번번이 실패한 철도 개혁을 성공시켰다. 1938년 국영철도공사(SNCF)가 설립된 이후 처음으로 기관사 종신고용 혜택을 없애고 직원 가족들을 위한 공짜표 등 복지 혜택도 줄였다. SNCF 노조가 반발해 파업에 돌입했지만 마크롱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고수하며 3개월을 버텨 노조를 굴복시켰다. 3년째인 올해는 연금 개혁과 함께 실업 급여 수령 기준을 까다롭게 바꾸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③사심 없는 진정성 반대파도 인정
프랑스는 사회주의 전통이 강한 나라라서 마크롱식 개혁에 심리적 저항이 크다. 하지만 그가 특정 정파를 편든다든가 사리사욕을 채운다는 불신은 거의 없다. 연금개혁에서 보듯 마크롱의 개혁은 일관된 맥락이 있다. 재정 지출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국민의 희생과 양보를 요청한다. 모든 개혁안이 인기를 얻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마크롱이 사심(私心) 없이 국가의 체질 개선에만 집중한다는 진정성만큼은 부인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진통을 겪어도 개혁이 하나둘 이뤄지는 배경이다. 마크롱은 '노란 조끼' 시위 수습책의 하나로 자신이 졸업한 정·관계 엘리트 양성 교육기관인 '국립행정학교(ENA)'를 폐지하겠다고 했다. 모교를 없애는 쉽지 않은 선택은 박수를 받았다.
마크롱은 정치권의 희생도 함께 요구한다. 상·하원 의원 정원을 925명에서 694명으로 25% 줄이려고 한다. 프랑스 하원은 개혁 법안을 빨리 통과시켜달라는 마크롱의 독촉으로 지난해 주말 휴무 없이 17일 연속 법안 심사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주 80시간 넘게 일한 여당 의원들이 고되다며 비명을 질렀다.
실현 가능성 있는 목표를 제시하는 것도 마크롱 리더십의 중요한 줄기다. 취임 초 그는 임기 말인 2022년에 실업률 7%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일간 르몽드는 "올 연말 실업률이 8.3%까지 떨어지고 2022년에는 7% 달성이 가능할 전망"이라고 했다. 마크롱은 공무원 감축도 추진 중인데 감원 규모가 전체 560만명 중 12만명이라 실현 가능한 범위에 있다. FT는 "마크롱이 경제를 위해 정치에서 먼저 혁명을 일으켰다"고 했다.
[대통령·하원의원 임기 5년, 대선 한달 뒤 총선, 새 대통령에 힘 몰아주는 구조]
다른 '유럽 빅5' 여당은 과반 미달… 연정에 의존하느라 정치 불안정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당선을 확정한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는 2017년 5월 7일 치러졌다. 바로 다음 달인 6월 18일에는 총선이 열렸다. 프랑스에서는 대통령과 하원 의원의 임기가 각 5년으로 같고, 대선 직후 총선을 치른다. 대통령이 취임 초 충분한 의회 의석을 확보할 기회를 주고 임기도 함께할 수 있게 한다.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기반이다. 2017년 총선에서 마크롱의 신당 '앙마르슈'는 하원 577석 중 350석을 차지해 여유 있게 과반수를 확보했다.
이런 정치 시스템의 안정이 유럽에서 프랑스가 다른 나라들보다 순항하는 비결이 되고 있다. 요즘 유럽에서는 의회정치가 무너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당 난립으로 혼란을 겪는 나라가 많다. EU(유럽연합) 28개 회원국 중 과반수 여당이 있는 나라는 프랑스·헝가리·폴란드·그리스·몰타 등 5개국뿐이다. 대부분 회원국에서 극우 정당이 득세하면서 중도 우파 정당의 입지가 좁아졌다.
유럽 '빅5' 국가 중 프랑스만 빼고 영국·독일·이탈리아·스페인의 여당은 모두 과반수에 미달해 연정(聯政)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영국 보수당, 독일 기민당, 이탈리아 오성운동 등 주요국 집권당은 연정 파트너 정당과 불협화음을 내며 정치 불안을 가중하고 있다.
유럽의 3대 강국 중에서도 프랑스가 영국·독일에 비해 역동적인 흐름을 타고 있다. 영국은 브렉시트(EU 탈퇴)를 3년 넘게 해결하지 못해 나라 전체가 우왕좌왕하고 있고, 독일은 14년째 집권 중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레임덕을 겪고 있어 사회 전반의 활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