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는 조국에게 유리한 보도만 하라는 거냐." "회사가 묵묵히 일해온 기자들을 한순간에 '기레기'로 만들었다. 그런 판단을 한 사장과 간부들보다는 적어도 '기레기'로 낙인찍힌 그 기자들이 국민의 알 권리와 진실을 훨씬 더 염려해왔다."

KBS가 조국 장관 아내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자산 관리를 맡은 한국투자증권 김경록 차장 인터뷰와 관련,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별도의 특별취재팀을 만들어 조국 관련 보도를 맡기기로 한 사실이 알려진 10일, KBS 내부에선 회사 결정에 반발하는 기자들의 비판이 터져나왔다. "양승동 KBS 사장과 경영진은 우리 기자들보다 유시민을 더 믿는 것이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KBS는 기자들보다 유시민을 더 믿나"

두 달 동안 조국 가족 사건 취재를 해온 KBS 법조팀 기자들은 이날 법원과 검찰청이 있는 서울 서초동이 아닌 여의도 본사로 출근했다. 아무 공식 직함도 없는 정치 유튜버의 말 한마디에 경영진이 기자들의 출입처를 없애버리자, 한 언론학자는 "KBS 기자들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KBS 사내 게시판에는 "이런 회사에서 누가 일을 열심히 하나. 열심히 하면 이렇게 날려버리는데…" "사측은 (유 이사장에 대해) 소송 등 가능한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서 대응해야 한다"는 말들이 쏟아졌다.

당초 KBS는 "김 차장 인터뷰는 당일이 아닌 다음 날 보도했으며, 인터뷰 내용을 검찰에 유출했다는 유 이사장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며 법적 소송 방침까지 밝혔다. 그러나 KBS 경영진은 단 하루 만에 입장을 바꿔 여권 유력 정치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 과정에서 유 이사장은 9일 오후 자신의 유튜브 채널 '알릴레오'로 생방송을 하면서 "(오전에 한 라디오 방송에서)양 사장에게 인터뷰 영상과 (보도된) 뉴스를 비교해 보라고 했다. 입수한 첩보에 따르면 오전 중 그 일이 실제 일어났다고 한다. KBS 안에서 논의를 한다니 조금 지켜보면 좋을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스스로 KBS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며 경영진 움직임을 전해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과시한 것이다. 한 KBS 기자는 이날 사내 게시판에서 "유 이사장은 사건 초기 최성해 동양대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번 사건의 '플레이어'로 의심받는 사람의 일방적 주장을 회사가 수용한 것이냐"며 실망감을 표시했다.

◇"극렬 지지자들 공세에 공영방송 굴복"

10일 오전 KBS 사회부 김모 기자가 보도본부 전용 게시판에 ‘본부장은 해명하십시오’라고 띄운 글의 앞부분. ‘동의한다’는 댓글이 60건 넘게 붙었다.

KBS 노동조합(제1노조)은 이번 사태를 지난 6월 '시사기획 창-태양광 복마전편' 재방송 불방 사태에 이어 또다시 KBS가 외부 압력에 무릎을 꿇은 사례로 지목하며, 유 이사장과 KBS 경영진 사이 내통 의혹을 제기했다. KBS 노조는 성명을 통해 "KBS 기자가 검찰에 정보를 흘렸다는 사실관계가 드러난 게 없는데, 사측은 법조팀에 대한 사실상의 업무 배제와 외부 조사위 구성을 결정했다"며 "특히 회사의 공식 입장이 나가던 시각에 유 이사장이 유튜브로 입장문에 실린 내용을 방송한 것은 KBS 간부 누군가가 조치 내용을 미리 알려줬거나, 유 이사장과 상의를 한 것인지 명백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노총 산하 언론노조 KBS본부(제2노조)도 이날 성명을 내고, "외부 조사위 구성과 특별취재팀 구성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직 사퇴를 선언한 성재호 사회부장 역시 언론노조 소속으로, 2017년 9월 대규모 파업 당시 언론노조 위원장을 맡아 5개월의 장기 파업을 이끈 강성(强性) 인물이다. 성 부장은 이날 게시판에서 유 이사장에 대해 "한 진영의 실력자가 한 개인(김경록 차장)의 희생을 당연시하면서 '시대정신'을 앞세운다면 언제든 파시즘으로 돌변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KBS 공영노조(제3노조)도 "이제 내부에서조차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반발하고 있는 것"이라며 "편파·왜곡·조작을 멈추지 않고 조국과 문재인 정권 지키기에 앞장선다면 국민이 KBS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황근 선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유튜브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극렬 지지자들을 모아 공영방송을 굴복시킨 행태"라며 "포퓰리즘이 심해져 전체주의 사회로 간 남미 국가들에서나 볼 수 있는 민주주의 퇴보 징후가 보여 우려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