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북부 하트퍼드셔에 사는 캐서린 맨(31) 부부는 24일(현지 시각) 지중해 휴양지 메노르카섬 공항에 이틀째 발이 묶여 있다. 부부는 생후 8개월 된 딸과 함께 공항에서 자판기 음식을 먹으며 버티고 있다. 원래는 전날 런던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부부는 여행사 '토머스 쿡' 소속 여객기로 귀국할 계획이었는데, 이 회사가 23일 갑자기 파산을 선언하면서 비행기가 안 떴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데일리메일 인터뷰에서 "딸에게 줄 분유가 떨어졌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올해로 창립 178년을 맞은 세계 최고(最古) 여행사인 영국의 토머스 쿡(Thomas Cook)이 파산하면서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토머스 쿡은 23일 채권단이 요구한 2억파운드(약 3000억원)를 막을 방법을 찾지 못해 파산을 선언했다. 토머스 쿡은 계열사인 '토머스 쿡 항공'을 통해 여행 상품 고객 수송용인 40대의 자체 여객기를 세계 각지로 운항하고 있다. 하지만 파산으로 채권단이 40대를 모두 압류하는 바람에 운항이 전면 중단됐다. 15만6800여명의 영국인 여행객이 18개국, 52개 여행지에서 예고 없이 발이 묶이는 신세가 됐다.
영국 정부는 15만명이 넘는 여행객들을 모두 본국으로 수송하는 작전을 시작했다. 2차 대전 중인 1940년 됭케르크 전투 당시 영국군이 33만명의 연합군 병력을 선박 등을 이용해 프랑스에서 탈출시킨 이후 최대 규모의 수송 작전이다. BBC는 "평시에 벌어진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수송 작전"이라고 했다. 토머스 쿡은 무리한 인수·합병으로 적자가 늘어 빚 감당이 어려웠고, 젊은 층이 패키지형 여행 상품보다 자유 여행을 선호하면서 수익이 줄어 경영난에 시달려 왔다. 2011년 이후 은행 빚 이자로만 12억파운드(약 1조7800억원)를 썼다.
토머스 쿡의 갑작스러운 파산으로 인생 중대사가 망가진 사례가 속출했다. 영국 중부 맨체스터에 사는 레이턴 로체와 내털리 웰 커플은 오는 27일 그리스 코스섬에서 가족·친구들을 불러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23일 새벽 맨체스터공항에 도착한 로체 커플은 토머스 쿡 파산으로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가족이 코스섬에 먼저 가 있는 상황이라 4000파운드(약 600만원)를 주고 다른 항공권을 사야 했다.
세계 각지에서 토머스 쿡을 통해 예약을 받은 호텔들은 숙박료를 정산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며 여행객들을 쫓아내고 있다. 보통 여행사들은 숙박료를 3개월 후에 지불한다. 소셜미디어에는 "호텔 측이 '당장 돈을 내지 않으면 나가 달라'"고 요구한다는 불만이 올라오고 있다. 일간 가디언은 "튀니지의 한 호텔에서는 보안 요원이 돈을 내지 않은 영국인 투숙객을 구금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영국 정부는 항공관리국(CAA)이 나서 임시 비행기를 대거 편성하며 여행객들을 귀환시키는 긴급 작전에 돌입했다. 브리티시항공, 이지젯 등 다른 항공사 여객기 45대를 끌어모았고, 이 45대가 2주간 1035편을 운항하며 15만명이 넘는 여행객들을 영국으로 데려올 계획이다. 회사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규정을 담고 있는 항공사업자 면허를 영국 정부가 토머스 쿡에 발급한 상황이라 정부가 토머스 쿡 손님들을 실어 날라야 할 의무가 있다고 영국 언론들은 전했다.
각각 1만명가량의 자국민이 토머스 쿡을 통해 외국에 나가 있는 프랑스와 노르웨이를 비롯해 유럽 16개국도 각자 자국민 송환 작전을 벌이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영국 내 9000명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 2만1000명에 달하는 토머스 쿡 직원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경영진은 거액의 성과급을 받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 언론에 따르면 피터 판크하우저 토머스 쿡 최고경영자가 2014년 취임 이후 830만파운드(약 123억원)를 받았다. 최근 5년 사이 주요 임원들이 2000만파운드(약 300억원)의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회사를 망가뜨리는 바람에 막대한 혈세를 투입해야 할 상황을 초래한 사람들이 많은 돈을 챙겨갔다는 사실에 분노한다"고 했다.
영국 정부가 토머스 쿡 고객들을 수송하기 위해 부담해야 할 비용은 적어도 1억파운드(약 1480억원)로 추산된다고 일간 더타임스는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