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방송 중에 제가 들고 있는 이 볼펜이 일제가 아니냐는 시청자의 항의 전화가 왔습니다. 일본에 대한 우리 국민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 볼펜은 국산입니다. 9시 뉴스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4일 밤 KBS 메인뉴스(뉴스 9) 진행자가 뉴스를 마치며 이같이 말했다. KBS는 다음 날 아침 〈"이 볼펜은 국산입니다" KBS 뉴스에 초유의 클로징 등장한 사연〉이란 제목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소개한 인터넷 기사까지 내보냈다. 그러자 네이버에만 1000개 넘는 댓글이 붙었다. '일본인과 결혼한 사람은 다 이혼하거나 추방해야 하는 건가' '고가 의료기기 90%는 일제다. 수술도 받지 마라' 등 대부분 조롱 댓글이었다. '그 뉴스를 찍는 카메라는 어디 것이냐'는 댓글도 있었다. KBS 메인뉴스 촬영 카메라는 일본 소니사(社) 제품으로 알려졌다.

지난 4일 KBS '뉴스9' 앵커가 볼펜을 들어 보이며 "이 볼펜은 국산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5일 서울 종로구 지하철 1호선 종각역 인근에 '2020 도쿄올림픽 보이콧'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는 모습. 이재명지지연대에서 내걸었다. 종로구 관계자는 "허가받지 않은 현수막이지만, 반일 현수막을 함부로 떼긴 어려워 민원이 들어올 경우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2. 산업통상자원부는 소셜미디어에 현 상황을 IMF 외환위기에 빗대며 사실상 반일(反日) 불매운동을 부추기는 게시물을 올렸다가 이틀 만인 5일 별다른 설명 없이 삭제했다. 산자부는 게시물에서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IMF 외환위기 때 결혼반지, 돌반지 팔아 외채 갚아 세계를 놀라게 한 국민 아닙니까?"라고 적었다. 첨부한 가상(假想) 카카오톡 대화창 이미지에는 '진짜 열 받는다. 당하고만 있을 거야? 받은 만큼 돌려주자' '매운맛을 보여주자' 등 표현이 담겼다. 산자부 측은 "부정적 댓글이 있어 지웠다"고 했다.

한·일 갈등이 고조되면서 국내 곳곳에서 크고 작은 '반일 소동'이 잇따르고 있다. 일본 제품을 가지고 있다거나, 직계가족 중 일제강점기 하급 공무원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항의와 비난의 대상이 됐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사케 반주(飯酒)'를 둘러싸고 여야(與野)가 벌였던 정치권 저질 반일 공방이 민간으로 번졌다는 해석이 나왔다.

5일 소셜미디어에서는 문재인 정부 고위 공무원들의 '일제 자동차 보유 현황' 표가 떠돌아다녔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김현철 전 청와대 경제보좌관, 이의경 식품의약품안전처장 등 다수가 일제차를 가졌다는 내용이었다. 확인 결과 표는 대체로 사실이었으나 작년 기준으로 작성됐고, 그사이 차를 처분한 공직자도 있었다. 소셜미디어에선 '2020 응답하라, 친일파 후손'이란 이미지도 돈다. 문 대통령 부친이 일제강점기 흥남시청 과장을 지내는 등 여권(與圈) 주요 인사들의 부친·조부가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했다는 내용이다.

일제차를 대상으로 일부 자동차 정비업체가 수리를 거부하거나, 테러를 가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차주들은 자구책을 내고 있다. 닛산 차량을 가진 정모(30)씨는 최근 자동차에 '일본차, 폐차하러 감'이라고 쓰인 스티커를 붙였다. 정씨는 "만나는 사람마다 '지금 일본차 타도 괜찮으냐'고 물어봐서"라고 했다. 시중에선 '일본차라 죄송해요'라는 스티커도 팔린다.

일제(日製) 색출 운동의 불똥은 대한적십자사에도 튀었다. "헌혈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이온음료가 일본 회사 것"이라는 비난과 교체를 요구하는 민원 등이 인터넷으로 5일까지 19건, 전화로 2건 접수됐다. 적십자사 측은 "이번에 들어온 민원은 내년 업체 선정에서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지방자치단체들도 뛰어들었다. 서울에선 중구청이 6일부터 주요 도로의 가로등 1100곳에 태극기와 일본 보이콧 배너 깃발을 걸기로 했다. 성북구청장은 2일 석관초등학교에서 팻말을 들고 학부모들에게 대일(對日) 불매 동참을 호소했다. 구로구청장은 2일 구청 현관 앞에서 직원들과 일본 제품·일본 여행 보이콧 문구가 적힌 종이를 들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경기도는 5일부터 이달 말까지 '반도체 소재 장비 국산화 및 해외 투자유치 아이디어' 공모전을 연다고 밝혔다. 그러자 "21세기에 국민에게 자력갱생하라는 거냐"는 댓글이 붙었다. 수원시는 일제 사용과 일본 여행을 거부하는 '신(新)물산장려운동'을 선언했다. 수원시 외에도 안양·군포·시흥·양주 등이 구청 차원에서 일제 구매를 전면 중단하기로 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상근자문위원은 "단순한 캠페인을 넘어 지방단체장들이 국가 제품을 한 달 이상 불매할 경우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에 저촉돼 국익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