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중요한 직책에 대한 결정을 단독으로 내리지 않겠다."(보리스 존슨)

"(트럼프 대통령이) 무례하고 영국을 존중하지 않았다. 내가 총리가 된다면 우리의 대사들은 모두 자리를 지키게 하겠다."(제러미 헌트)

9일(현지 시각) 영국 샐퍼드에서 열린 총리 후보 TV 토론회에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외무장관(왼쪽)과 제러미 헌트 현 외무장관이 상대를 지목하며 발언하고 있다.

차기 영국 총리 자리를 두고 대결을 벌이고 있는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과 제러미 헌트 현 외무장관이 9일(현지 시각) 첫 TV 토론에서 주미 영국 대사 거취 문제를 놓고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킴 대럭 주미 영국대사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를 "무능하고 불안정하다"고 평가한 외교 전문을 본부에 보고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인 교체 압박을 받으며 배척당했다.

영국 민영 방송사 ITV가 주최한 9일 토론회에서 진행자가 '총리가 되면 대럭 대사를 경질할 것이냐'고 묻자 존슨은 답변을 회피했다. 진행자가 계속 물고 늘어졌지만 그는 끝내 "나는 그 문제에 주제넘게 굴지 않을 것"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존슨은 "내가 개인적으로 대럭 대사를 비판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닐 수 있지만, 트럼프는 영국의 정치 논쟁에 끌려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대럭 대사의 과실로 트럼프가 피해를 본 것처럼 말한 것이다. 그는 또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며 "나는 백악관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다. 이어 "외교 문서가 유출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며 "영국 공직자들이 보안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문건을 유출한 영국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헌트는 완전히 달랐다. 대럭 대사의 경질론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헌트는 "동맹이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며 "트럼프는 무례하고 영국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헌트는 트위터에서도 "미국의 외교관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개인 의견을 전달할 것이고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는 트럼프가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를 직설적으로 비판한 트윗을 리트윗하며 "메이 총리와 내 조국에 잘못된 발언"이라고도 했다.

두 사람의 답변을 보면 헌트는 국가의 존엄과 자존심을 확실하게 지킨 반면, 존슨은 미국과 트럼프의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헌트가 영국 새 수장으로서의 면모를 더 분명하게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언론과 전문가들의 평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앞둔 시점에서 EU에서 이탈하면 영국은 미국과의 관계가 예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미국에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더 의존할 수밖에 없다. 브렉시트가 되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도 새로 체결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을 자극하는 것이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대럭 대사의 문건 파동은 영국에 실질적인 피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다. 이날 워싱턴DC에서 열릴 예정이던 양국 FTA 협상이 뚜렷한 이유 없이 돌연 취소된 것이 단적인 예다.

이날 토론회에 대해 BBC는 "헌트가 솔직하고 직접적인 의사표시를 한 반면, 존슨은 당황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친미 외교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존슨은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며 미국을 자극하지도 않고 미국에 비굴하지도 않게 비켜갔다"며 "이것이 존슨에게 정치적으로 현명한 행동"이라고 했다. 영국의 국익이라는 측면에서는 존슨의 토론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