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 가야산 해인사에는 화엄종의 대가로 유명한 희랑대사가 있었다. 최치원이 그를 부처에 비유한 시를 지어 보낼 정도로 고승이었다. 희랑대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기도 했는데, 태조가 희랑대사에게 500결의 토지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열반 전 자신의 모습을 똑같이 재현한 나무 조각상을 만들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것이 보물 999호 희랑대사 좌상이다.

지난 10일 오후, 희랑대사 좌상을 실은 가마와 고려 목판을 정성스레 받든 스님들이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들어섰다. 해인사가 소장한 고려 유물 11점이 12월 4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하는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대고려전(大高麗展)'에서 전시되기 위해 옮겨지는 이운(移運)과 영접 행사였다. 희랑대사 좌상 등은 해인사를 처음 떠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유물 속에 살아 숨쉬는 자랑스러운 민족사를 모두가 함께 느끼게 될 것"이라고 했다.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해인사 유물 이운(移運) 및 영접 행사에서 고려 목판을 받든 스님들이 행진하고 있다.

이보다 앞선 9일 오전에는 경남 합천 해인사 법보전 앞에서 고려 목판의 '외출'을 부처에게 알리는 고불식(告佛式)이 열렸다. 해인사 주지 향적 스님이 배기동 관장과 함께 고려 목판의 복제본을 가마에 실은 뒤 일주문까지 행진하는 의식이 펼쳐졌다. 10일 오전 고려 왕들의 위패를 모신 경기 연천 숭의전에서는 희랑대사 좌상 복제품과 고려 태조 왕건 초상화가 만나는 행사가 열렸다.

고려 목판과 희랑대사 좌상 모두 이운 행사에는 복제품이 쓰였지만 박물관에서는 진품이 전시된다. 팔만대장경으로 알려진 대장경판(국보 32호)을 국가기관인 대장도감에서 새긴 것과는 달리, '대고려전'에서 전시되는 해인사 고려 목판 4점은 사찰이나 지방관서에서 만든 것들이다. 고려 불교 문화와 목판 인쇄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된다. 이 중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 주본'(국보 206호)은 불교의 기본 경전인 화엄경을 그림으로 풀어 중생을 계도하기 위해 만든 목판의 일부다.

당초 '대고려전'에는 북한으로부터 고려 태조 왕건 좌상 등의 유물을 대여받을 예정이었으나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박물관 측은 대여가 성사되면 '대고려전' 개막 이후라도 가져오겠다는 입장인데, 이 경우 희랑대사 좌상과 1100년 만의 '사제(師弟) 상봉'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