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폭발적 인기를 누렸던 어린이 잡지 '보물섬'에 역사 만화 '승전고를 울려라'가 연재됐다. 가야가 멸망한 뒤 일본으로 피신했던 왕족이 옛 땅으로 돌아와 유민들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품 속에 숨겨뒀던 깃발 하나를 펴들자 가야 노인이 눈을 크게 뜨며 감탄한다. "오, 이것은 우리 가야의 상징인 태양의 깃발!" 그 깃발은 다름 아닌 욱일기(旭日旗)였다.
만화는 프랭크 호소노라는 저술가가 '고대 가야인이 바다를 건너가 일본을 정복하고 천황이 됐으며, 가야의 상징이 대대로 전해져 훗날 일본 해군기가 됐다'고 쓴 책의 내용을 반영했다. 물론 학술적 근거 없는 황당한 이야기다. 이 만화가 요즘 나왔다면 보물섬은 네티즌들의 '총공세'에 시달렸을 것이다.
1987년 국내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탑건'에서도 욱일기가 나온다. 주인공(톰 크루즈)의 동료인 미군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이 욱일기가 그려진 헬멧을 쓰고 다닌다. 미국이 욱일기에 '불감증'을 드러낸 사례는 많다. 주일 미 육군 항공대대, 사세보 함대기지, 미사와 해군 항공 시설 등 여러 주일 미군 부대의 공식 엠블럼이 욱일기 문양을 활용한 것이다. 유럽 국가들의 둔감증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 때문에 '한국과 중국이 최근 들어서 욱일기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일본에서 나온다. 일본의 '진보 언론'으로 알려진 아사히신문의 사기(社旗)는 욱일기를 4등분한 모양이다.
한데 지금 욱일기를 보면 '욱!' 하는 감정부터 앞서는 건 왜일까. 태평양전쟁 종전으로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나라들에서 오히려 욱일기에 대한 반감이 더 커지고 있는 것은 왜일까.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사실이 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일본이 과거 역사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위대 함정이 한국에 올 때 욱일기를 떼 달라'는 부탁에 '무례하다'고 반응하는 건 저들의 인식 구조상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 깃발을 앞세웠던 일본군은 예의를 갖춰 침략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