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역사 기록물은 한국에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다. 3245책, 기록 일자 10만4000일, 기사 수 180만건, 글자 수 2억4300만자로 팔만대장경 목판본의 5배, 중국 이십오사의 6배 분량이다.
도대체 어떤 기록물이기에 이리 방대한가? 조선 국왕 비서실이었던 승정원에서 아이돌 매니저처럼 매일 임금을 수행하며 온갖 일정과 대화와 읽은 문서들을 낱낱이 적은 일지다. 이 때문에 편집을 거친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내용이 많다.
1752년 2월 2일의 경우 '실록'에는 승지 임명 사실 한 줄만 기록됐지만 '승정원일기'엔 영조가 세 살배기 의소세손(정조의 형)의 건강을 두고 관리들과 은밀히 나눈 대화가 자세히 실렸다. 왕은 '유모가… 술을 자주 마시는데, 심지어 밤에도 마셔 젖에 젖은 아이의 옷에서 술 냄새가 난다'고 털어놓는다. 신하들은 경악하지만 영조는 '주(酒)자만 들어도 떨린다'고 탄식하면서도 손주를 맡긴 유모에게 막상 벌을 주기 어려워 쩔쩔맨다. '임금'보다 '할아버지'의 모습이 더 돋보이는 장면이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청나라에 굴욕을 겪은 기사에선 서슬 퍼렇던 청 태종이 소변을 보러 가자 우리 임금이 그 틈을 타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나온다. 함경도에선 무거운 세금 때문에 사내아이를 낳으면 버리거나 절에 보내는 일이 일어났고(1680년 윤8월 19일), 가짜 족보 공장을 차린 한 역관이 책장을 칼로 오려내 인쇄한 종이를 갈아 끼우는 수법으로 장사를 했다(1764년 10월 19일)는 등 '사회면 기사'들도 생생하다.
워낙 엄청난 분량이다 보니 지금까지 번역률은 겨우 22.8%. 이 속도라면 완역은 2051년에야 이뤄질 전망이다. 교육부 산하 한국고전번역원은 지난 7일 '승정원일기' 정조 부분에 대해 북한과 공동 번역 작업을 추진하려고 통일부에 접촉 승인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성사될 경우 완역이 2045년으로 앞당겨진단다.
그런데 얼마 전 "AI(인공지능) 번역기 덕에 '승정원일기' 완역이 30년 빨라질 것"이라고 장담했던 건 어찌 된 걸까. 내년 예산엔 AI 번역건이 잡혀 있지 않다. '첨단 기술'이 '남북 교류'에 앞길을 양보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