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석 특파원

커다란 평면 모니터가 달린 애플 아이맥 컴퓨터 1000대가 3개의 널따란 교실에 물결처럼 놓여 있었다. 거대한 PC방에 들어온 듯했다. 각 컴퓨터 앞에는 20대 청년들이 각자의 코딩(컴퓨터 프로그래밍) 과제를 해결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지난달 5일(현지 시각) 파리17구의 코딩 교육기관인 '에콜42'에 찾아갔더니 프랑스 IT(정보통신) 기대주들이 프로그래밍을 연마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교실에는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아이맥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짜는 데 골몰하는 젊은이가 많았다. 프로그램을 만들다 부딪힌 난관을 어떻게 돌파할지를 놓고 여럿이서 토론하는 장면도 이어졌다. 프랑스 북부 릴(Lille)대학 의대를 중퇴하고 6개월 전 이 학교에 입학했다는 위고 렐리(24)는 "하루 10시간씩 프로그래밍을 익히며 IT에 눈을 뜨고 있다"며 "코딩을 완벽하게 익혀 AI(인공지능) 분야에서 창업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교수·교재·학비가 없는 3무(無) 학교

2013년 개교한 에콜42는 현장에 즉시 투입이 가능한 실무형 IT 인재를 길러내는 혁신 학교로 각광받고 있다. 이 학교는 프랑스 교육부가 인가한 정식 학위 과정이 아니다. 제도권 교육 바깥에 있는 사설 학교다. 그래도 매년 5만명 이상이 지원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다. 약 5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하는 1000명가량의 학생은 기존 학교 교육 체계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프랑스의 코딩 전문학교 에콜42를 세운 자비에 니엘(가운데) 프리모바일 회장과 니콜라 사디락(맨 오른쪽) 교장이 컴퓨터가 놓여 있는 교실에서 활짝 웃고 있다. 에콜42에는 이런 아이맥 컴퓨터가 1000대 있다.

에콜42는 교수, 교재, 학비가 없는 '3무(無)' 학교다. 오직 온라인으로 학교가 제시한 프로그래밍 과제를 스스로 수행하면서 3년 과정을 마쳐야 한다. 모르는 게 나타나면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그룹 스터디를 함께하는 동료 학생들끼리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학교는 프로그래밍 전문가 5명으로 구성된 학습연구팀이 학생들에게 수십 단계로 구성된 프로젝트 과제를 내주는 게 전부다. 학생들은 단계별 과제를 해결하며 스스로 코딩 능력을 키운다. 프로젝트를 하나 해결할 때마다 다음 단계에선 더 까다롭고 복잡한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프로젝트는 실력, 관심 분야를 고려해 학생별로 다르게 구성돼 있다. 이를테면 게임업계에 진출하고 싶어하는 학생에겐 게임 프로그래밍 프로젝트 비중이 높다.

스탠퍼드대 물리학 박사인 니콜라 사디락 교장은 "책에서 확인하거나 누군가 가르쳐줘서 프로그래밍을 익히는 경직된 학습 체계로는 IT 업계의 빠른 변화에 적응하는 인재를 키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집단 지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성을 기를 수 있는 곳이 에콜42"라며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학교라는 자부심이 있다"고 했다.

◇24시간 개방하고 학생들 국적은 60개

에콜42는 자비에 니엘 프리모바일 회장이 2013년 4800만유로(약 625억원)의 사재를 들여 세웠다. 이후 그는 매년 학교 운영비로 600만유로(약 78억원)를 쾌척하고 있다. 고교 중퇴 후 자수성가한 니엘 회장은 낙후된 프랑스의 IT 산업을 일으킬 역군을 길러내겠다며 에콜42를 세웠다. 학교 이름에 붙은 42라는 숫자는 영국 소설가 더글러스 애덤스의 SF(공상과학) 소설에서 삶과 우주를 밝혀주는 궁극적인 숫자가 42라고 제시한 것에서 따왔다. 가난한 학생들도 프로그래밍을 배울 수 있도록 학비를 일절 받지 않는다.

에콜42는 입학 전형부터 다르다. 지원 자격은 '18~30세 사이'라는 나이만 충족하면 된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매년 지원자 약 5만명을 대상으로 온라인으로 논리력 테스트를 실시한 뒤 3000명을 추린다. 1단계를 통과한 3000명을 '피신(piscine·수영장이라는 뜻)'이라는 한 달짜리 과정에 넣어 학업에 대한 열의를 중점적으로 평가해 1000명가량을 입학시킨다.

학생들은 주부, 화가, 고교 중퇴생, 요리사 등 경력과 학력이 다양하다. 재학생들의 30%가 외국인이고 국적은 60개에 달한다. 대학을 다니지 않고 요리사로 일했던 이스마엘 주르당(24)은 "학비 걱정 없이 IT에 집중할 수 있어 만족스럽다"며 "첨단 산업 분야 인맥을 만들기도 좋다"고 했다. 에콜42는 365일 24시간 개방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시간에 와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다. 학교에서 숙식하는 학생도 있다. 복도에는 학생들이 밤샘할 때 이용하는 간이침대들이 놓여 있었다.

◇졸업생 100% 취업 성공…교내 스타트업 150개

에콜42의 성과에 대해서는 갈채가 쏟아진다. 졸업생들이 유럽 굴지의 대기업과 구글, 페이스북 등 IT 업체에 취업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같은 국제기구에 IT 전문가로 둥지를 틀기도 한다. 취업률은 100%다. 사디락 교장은 "취업하고 싶은데 못한 학생은 개교 이래 한 명도 없다"고 했다.

별도로 학생들이 만든 교내 스타트업이 150개에 달한다. 재학생의 30%는 이런 스타트업에 근무하면서 동시에 코딩 공부를 하고 있다. 이 학교에서 탄생한 사진공유 서비스업체 포톨리아(Fotolia)는 2014년 미국 어도비에 8억8000만달러(약 9800억원)에 팔렸다. 유럽 최대 카풀 서비스인 블라블라카의 주축 멤버들도 에콜42 출신이다.

학생들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만들어낸 갖가지 프로그램은 기업 현장에서 쓰이고 있다. 머리카락 사진을 찍으면 모발의 특징을 분석해주는 프로그램을 화장품 회사 로레알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학생들은 3년 과정 중 최소한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0개월 이상 인턴십을 하면서 실무 경험을 의무적으로 길러야 한다. 이 학교 학생 위고 푸크(28)는 "2년 전 에콜42에 와서 집중적으로 코딩 훈련을 반복하고 동시에 인턴십으로 실무를 익혔더니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며 "학력이 고교 중퇴라는 핸디캡은 이미 극복했다"고 말했다.

에콜42는 프랑스 명문 경영대학원인 HEC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에콜42에서 만든 프로그램을 어떻게 상용화해 돈을 벌 수 있는지에 대해 HEC 교수와 학생들이 아이디어를 보태는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마크 쉬카레브(22)는 "법대를 다니다가 AI에 인생의 승부를 걸고 싶어서 중퇴하고 코딩을 배우고 있다"며 "기업들로부터 워낙 학교 평판이 좋아 대학을 그만둔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디락 교장은 "프로그래밍 실력을 키우고 집단 협업으로 과제를 해결하는 능력까지 갖추기 때문에 에콜42 졸업생은 어떤 회사에서든 '즉시 전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