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취임한 마하티르 모하맛(93) 말레이시아 총리가 본격적으로 자국 내 중국색 지우기 작업에 나섰다. 중국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 '동남아 맹주'라는 과거의 위상을 회복하려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하티르 모하맛(오른쪽) 말레이시아 총리가 31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를 말레이시아 행정수도인 푸트라자야의 집무실로 초청해 만나고 있다. 인도는 최근 마하티르가 각을 세우고 있는 중국과 경쟁하는 관계다.

마하티르 총리는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사업 일환으로 말레이시아에서 공들여 오던 동부해안철도(ECRL)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5월 27일(현지 시각) 발표했다. 지난해 왕융(王勇) 중국 국무위원이 시진핑 국가주석의 특사 자격으로 참석해 대대적인 기공식까지 열고 진행하던 공사에 전격적으로 제동을 건 것이다. '노(老)정객'의 뚝심에 중국은 충격에 빠졌다.

ECRL은 중국과 동남아를 잇는 일대일로 사업의 핵심 구간이다. 중국 윈난성 쿤밍(昆明)에서 시작해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말레이시아 국경을 넘은 뒤 전략적 요충지인 믈라카 해협의 무역항인 클랑으로 이어진다. 동남아의 육상·해상 운송망을 구축해 장악하려는 계획의 정점에 ECRL이 있다. 예정대로라면 2024년 완공 예정이었지만, 마하티르의 발표로 사업 전체가 불투명해졌다.

ECRL은 말레이시아 땅에서 진행되는 공사지만, 중국 국내 토목공사처럼 진행됐다. 시공은 중국교통건설이 맡았고, 550억 링깃(약 15조원)에 달하는 사업비의 85%는 중국수출입은행이 빌려주기로 했다. 마하티르는 이 점을 문제 삼았다. 그는 "우리가 중국에서 돈을 꿔다가 건설비를 대고, 그 건설 비용이 말레이시아로 들어오지 않고 중국 업자들에게 지급되다니, 이상한 계약"이라고 사업 방식을 조목조목 비난했다. 이 때문에 만약 ECRL 사업이 재개되더라도 마하티르는 중국의 입김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사업 조건을 대대적으로 손질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 결정은 표면적으로 거액이 투하되는 국책 사업을 정리해 나랏빚을 덜고 씀씀이를 줄이는 재정 건전성 강화 정책의 일환이다. 그러나 '차이나 머니'의 침투에 줄곧 비판적이었던 그가 본격적으로 중국 영향력 지우기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실제 그는 선거운동을 펼칠 때부터 "많은 이가 중국의 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그의 우려대로 중국은 동남아의 '전주(錢主)'다. 아시아 각국에 항구·철도 등 인프라를 까는 작업에 돈을 대고 있다. 중국 최전성기 때의 바닷길과 비단길을 재현하겠다는 의미로 '일대일로', 인도양을 낀 나라의 항구를 아름답게 연결하겠다는 의미로 '진주 목걸이' 등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엔 돈을 빌려주고 중국 영향력을 키우는 목적이다.

돈이 급한 아시아 여러 나라가 중국 제안을 덥석 받았다.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미얀마·이란, 급진 세력의 폭력이 끊이지 않아 외국 자본이 거들떠보지 않는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방글라데시 등에 중국 대출금은 단비였다. 25년 지속된 내전을 2009년 끝낸 스리랑카도 결국 중국밖에 돈 빌릴 데가 없었다.

스리랑카 남부 함반토타항(港)도 이런 방식으로 중국 돈 수십억달러를 빌려 조성됐다. 하지만 완공된 항구를 연결하는 4차선 고속도로엔 차가 없다. 항구에서 30㎞ 떨어진 국제공항엔 하루에 비행기 한 대만 오가고, 항구를 이용하는 선박도 하루 평균 한 척이다. 연이율 6% 상환 압박을 못 이긴 스리랑카 정부는 지난해 11억달러에 항구 운영권을 중국에 넘겼지만, 빚 일부를 갚았을 뿐이다.

마하티르는 스리랑카의 사례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중국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다. 그는 총선 전 블룸버그와 가진 인터뷰에서 "중국으로부터 꾼 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라 스리랑카가 자기 나라 땅을 많이 잃어버린 것"이라며 "우리는 우리 국토 땅덩어리를 외국 회사에 팔아치우길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마하티르가 중국에 맞서며 동남아에서 존재감이 옅어져 가던 말레이시아의 위상을 강화하는 효과를 노리는 측면도 있다. 미국의소리방송은 "작은 영국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를 아시아의 유력 경제 집단으로 키워냈었던 마하티르가 국가 명성의 복원을 모색하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