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한 시절에는 영웅이 그리워진다. 꼭 20년 전 우리나라가 그랬다. 1997년 1월부터 재벌과 기업이 잇달아 부도나자 금융기관들이 휘청거렸고 해외에선 채무 상환 요구가 빗발쳤다. 외환 보유액이 급감하자 우리 정부는 그해 11월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엉망이 된 꼬라지를 누군가 구원해주었으면' 막연히 바랄 때 야구선수 박찬호(LA다저스)가 보였다. 미국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외롭게 싸우며 승전보를 전해왔다.

박찬호장학회 20주년 행사가 지난 12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IMF 20년이 곧 박찬호장학회 20년이었다. 이날 유소년 야구 꿈나무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한 박찬호(44)는 "두려워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며 "성공은 남보다 우월해지는 게 아니라 진통을 겪으며 성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찬호는 1997년 첫 풀타임 선발투수로 활약하며 14승8패(방어율 3.38)를 거뒀다. 그는 20주년 감회를 묻자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도 하고 나라가 없어진다는 위기감이 팽배한 시절이라 희망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내게 감정이입을 한 것일 수도 있어요. IMF 외환 위기 때 영웅이라 불렸지만, 시련을 겪고 살아남은 분들이야말로 영웅이지요."

박찬호가 서울 밀랍인형 박물관인 그레뱅뮤지엄에서 자신의 밀랍 인형을 부둥켜안고 포효했다. 몸을 본떴을 뿐 아니라 투구 폼, 헤어스타일, 모자 등 콘셉트까지 그가 잡았다고 한다. 20년 전 IMF 외환 위기 때 영웅으로 불린 박찬호는 “국민들은 내 경기를 보면서 현실을 잠시 잊었던 것”이라며 “나는 그저 힘껏 야구공을 던졌을 뿐”이라고 했다.

1997년 서울역 노숙자들

야구공을 놓은 지 5년 된 왕년의 메이저리거는 여전히 짱짱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그레뱅뮤지엄에서 만나 악수하는데 묵직한 악력이 전해졌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데 야구 시즌 끝나는 10~11월엔 한국에 옵니다. 장학회, 리틀야구대회, 야구 캠프 등 제 이름을 건 행사들이 이 무렵에 몰려 있어요."

―마운드 밖 삶에는 완전히 적응했는지요.

"익숙해지는 과정이에요. 아이들 학교와 집안일 돌보는 게 야구만큼 어렵더라고요(웃음). 사회에 나오니 만나는 사람도, 음식도, 생활습관도 달라졌어요. 운동 중심이 아니라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요. 때로는 '내가 지금 잘살고 있나' 걱정도 해요. 커피나 콜라도 이젠 막 먹거든요."

―야구 할 땐 콜라도 안 마셨나요?

"저는 몸에 안 좋다는 건 입에 안 댔어요. 카페인 성분 때문에 잠이 안 올 테니까요."

―요즘엔 뭐가 어려운가요.

"미국에선 부모도 아이 학교에 자주 가요. 선생님 만나고 자원봉사도 하고 각종 행사에 참여하죠. 메이저리그에 처음 갔을 땐 클럽하우스에서 소통하고 다른 문화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는데 은퇴하고 나니 아이들 교육에 맞추어가는 게 그만큼 버겁네요."

―올해가 IMF 20년입니다.

"박찬호·박세리에겐 어떤 이미지가 들씌워진 것 같아요. 20년 전 외환 위기 때문에 때로는 영웅으로, 때론 아들·딸이나 오빠·누나로. 국민이 우릴 그런 존재로 만들어주셨죠. '금을 모은다, 실직자가 쏟아지고 노숙자도 많다'고 들었지만 저는 미국에 있어 체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스물네 살이 뭘 알겠어요. 궁금해서 1997년 시즌 끝나고 귀국해 서울역에 가봤죠."

―서울역에서 뭘 보았나요?

"멀쩡한 직장인이 노숙자가 된다니 믿기지 않았어요. 자존감 상실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귀가할 수 없다는 거예요. 혹시 사고라도 나면 안 되니까 마스크에 모자를 쓰고 좌우에는 경호원이 붙어 서울역에 갔어요. 처참하더군요. 지하철 통로에서 신문지 덮고 자고 여기저기 술병 보이고 한겨울에 맨발이 퉁퉁 부어 있고. 그러다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경찰이 출동했어요."

―네?

"저를 보고 누가 노숙자를 끌고 가는 줄 알고 경찰에 신고한 거예요."

―박찬호의 굴욕이군요.

"신분증을 보여주니 구경하던 사람들이 '야, 박찬호다!' 소리쳤어요. 노숙자들이 자다 깨 달려왔죠. 서울역 풍경은 참담했어요. 미국 TV에 비친 한국은 딱한 모습만 가득하던 시절입니다. '실직자 가정이나 소년소녀 가장, 야구를 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7월 박찬호와 그레뱅뮤지엄을 방문한 서울 갈산초등학교 야구부원들.

"국민 각자가 작은 영웅들"

박찬호장학회 출신 프로야구 선수로는 서건창(넥센) 구자욱(삼성) 구창모(NC) 박진형(롯데) 등 37명이 있다. 또 김태균(한화) 봉중근(LG) 김주찬(기아)은 그가 1994년 한국인 첫 메이저리거가 되면서 모교 한양대에 기탁한 장학금 수혜자다.

―20년간 350여명이 박찬호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저희 장학생 출신 프로 선수가 많다는 게 자랑이죠. 그동안 양준혁재단도 생기고, 올해 은퇴한 이승엽 선수도 장학사업에 관심이 많다고 해요. 아이들은 꿈을 키우고 저희는 사회에 공헌할 수 있으니 바람직한 일이지요."

―요즘도 가끔 공을 던지나요?

"골프를 더 많이 해요. 아이들 학교에 갈 때 가끔 야구 하는 소년들과 어울리지요. 부모들도 저를 반겨주고 함께 캐치볼을 하곤 합니다.

―장학회 창립식 때 다저스 동료였던 노모 히데오 선수가 내한해 축하해주었지요. 그는 '이겨야 하는 적(敵)' 아니었나요?

"그렇지 않았어요. 동료이자 스승이었죠. 그 선수보다 박찬호가 잘했으면 하고 응원한 한국 사람들 마음은 알아요. 어릴 때부터 일본을 꼭 이겨야 한다는 교육이 뼛속까지 배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저스에선 옆 라커를 쓰던 노모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마운드에서 멘털(정신)을 가다듬는 자세, 선발 등판을 준비하는 과정을요."

―IMF 시절 '한국의 영웅'이라 불릴 때 기분이 어땠나요?

"영웅이란 칭호가 머쓱하거나 싫진 않았지요. 제가 희망을 준 게 아니라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희망을 찾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IMF 외환 위기는 우리 역사에서 잊지 말아야 할 시기입니다. 왜 고비를 맞았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후대에 들려줘야죠. 제가 또 한국수출입은행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홍보대사예요."

―대외경제협력기금요?

"개발도상국을 돕는 기관이에요. 원조를 받다가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된 것은 대한민국뿐이잖아요. 우리는 다시 일어서는 저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본이 원조하는 돈이 훨씬 더 많지만 한국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싶어합니다. 의미가 다르니까요. 우리나라는 어려움은 잘 극복하는데 좋은 걸 유지하는 데 약한 것 같아요."

―무슨 뜻인지요.

"어려울 땐 단합을 잘하는데 위기가 사라지면 금방 갈라져 싸워요. 성숙해지질 않아요. 말이 옆길로 좀 샜는데 IMF 때 국민은 희망의 동아줄을 잡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영웅은 제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역경을 이겨낸 그분들이죠. 각자가 작은 영웅들이었습니다."

지난 3일 충남 공주에서 열린 제17회 박찬호기 전국 초등학교 야구대회에서 박찬호(뒷 줄 가운데)·이승엽·조인성 등이 초등학교 야구선수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어머니의 세탁기

박찬호 또래인 92학번은 야구계에서 황금 세대라 불린다. 조성민·임선동·차명주·박재홍 등 훌륭한 선수가 즐비했다. 박찬호는 "어렸을 때부터 열등감 덩어리였고 외로움을 많이 탔다"고 했다.

―어떤 열등감이었는지요.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아버지는 전파상을 하셨는데 가게에 딸린 단칸방에서 여섯 식구가 살았습니다. 친구 집에 가면 부러웠어요. 자기 방이 있고 수세식 화장실도 있으니까. 돈을 많이 벌고 싶었어요."

―그래서 야구를 시작했나요?

"아뇨. 야구부는 아이들 하교할 때 운동장에서 큰 솥에 라면을 끓여 먹었어요. 부러웠죠. 제가 또래보다 키가 크고 공 던지기를 잘해서 결국 야구부원이 됐어요."

―잘 하려면 특별한 동기가 필요할 텐데요.

"이듬해 초등학교 5학년 때 자다가 화장실에 갔는데 어머니가 제 유니폼을 손빨래하시는 걸 봤어요. 흙투성이 유니폼이 아침마다 깨끗해진 비밀을 목격한 겁니다. 울면서 잠들었어요. 성공해 세탁기를 사드리는 것, 제 인생 첫 번째 꿈이 됐습니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노모의 123승을 넘은 기록)처럼 빛나는 기록뿐만 아니라 부상과 슬럼프, '먹튀 논란'도 있었지요.

"강연에서는 제가 왜 부진했고 어떻게 이겨냈는지 말할 때 청중이 더 집중합니다. 우는 분들도 많아요. 저를 괴롭혔던 것들에 감사해요. 이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북돋우고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으니까요."

―동양인을 비하한 상대팀 투수를 향해 이단옆차기를 한 사건, 한 회에 만루 홈런 두 방을 맞은 장면(일명 '한만두')도 떠오릅니다. 어떻게 평정심을 되찾았나요.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것밖에 없어요. 다음 팀, 어느 타자를 상대할지 몰입하다 보면 저절로 사라집니다. 자꾸 과거를 되새기고 필름을 돌리니까 무거워지고 두려워지는 거예요."

―자서전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에서 인생 최고의 경기로 2012년 10월 3일을 꼽았습니다. 은퇴한 날이더군요.

"한 이닝만 던지려 했는데 당시 한용덕 한화이글스 감독대행이 '팬들을 위해 더 보여주자' 하셨어요. 6회 2사까지 잡고 내려왔지요. 메이저리그 첫 등판도 생생하지만 마지막 마운드는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최근 이승엽 선수도 은퇴했지요.

"야구계에는 '우리는 밤새 술 먹고도 잘 던졌어' '술 냄새 풍기면서도 홈런 펑펑 쳤지' 같은 전설이 있는데 저는 그게 싫었어요. 미국에선 아무도 그렇게 훈련 안 해요. 이승엽의 절제는 모범적이죠. 학창 시절 운동만 했다는 결핍감 때문인지 한국 스포츠 스타들은 은퇴하면 공부하고 싶어해요. 격려해주었지요(이승엽은 이날 박찬호장학회에 1억원을 기부했다)."

"소중한 건 124승이 아니라 98패"

박찬호는 잘 아는 야구장을 떠나 낯선 사회로 나갔다. 메이저리그에서 슬럼프에 빠졌을 땐 "넌 지금 30분 넘게 힘들고 두렵다는 얘기를 늘어놓았지만 은퇴 뒤 겪을 일은 더 무시무시할 것"이라는 심리치료사의 말을 떠올렸다고 한다.

―은퇴하면 더 힘들다니요.

"투수는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내일은 잘 던질 수 있을까, 이길 수 있을까'라는 희망이 있는데 은퇴하면 내일 게임 자체가 없다는 거죠. 이기고 싶어도 이길 수 없으니, 은퇴 이후는 더 버겁다는 얘깁니다."

―힘겨울 땐 어떤 주문을 외웠나요.

"좀 더 참자, 좀 더 참자, 했지요. 그렇게 단련하며 성장했어요. 124번의 승리보다 98번의 패배 때문에 은퇴하고도 만족할 수 있는 야구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능을 꽃피우지 못해 불안해하는 야구 선수에겐 어떤 조언을 건네나요.

"인내하라고, 외로움과 고통을 즐기라고 말해줄 겁니다. 너무 멀리 보지 말고 이룰 수 있는 가까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라고요. 지금 걱정하는 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요."

―20년 전 별명은 '코리안 특급'이었는데 요즘엔 '투 머치 토커(말 많은 사람)'더군요.

"하하하. 그 별명 아주 싫어해요. 방송에서 그렇게 편집해서 그렇지, 저 그런 사람 아녜요."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124승을 만든 야구공들.

―가장 아끼는 야구공이 있다면.

"메이저리그 124승의 야구공을 전부 가지고 있는데 스토리가 제각각이에요. 연패 끝에 오랜만에 승리한 날도 있지요. 갭(간격)이 큰 공일수록 사연이 많은 거예요. 한 경기에 만루 홈런 두 번 맞고 깨진 다음에도 버티고 버텨서 승리 공이 수십 개 생겨났고, 2007년 마이너리그에서 허송세월할 땐 '이게 끝이구나' 했는데 다시 올라와 7~8승을 더 보탰죠. 그렇게 하나하나의 공들이 모여 124라는 목표에 닿은 겁니다."

―한때 시속 100마일(160㎞) 강속구를 뿌렸는데 지금 던지면 얼마나 나올까요.

"70마일? 며칠 연습하면 더 빨라질 겁니다. 근력만큼 중요한 게 감각이거든요."

박찬호는 "'인내' '노력' '한 번만 더' '괜찮아' '할 수 있어' 같은 작은 긍정의 씨앗들이 쌓여 성공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고 했다. 이를테면 부분들의 총합이다. 명대사 "인생은 얼마나 센 펀치를 날릴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얻어맞고도 계속 움직이며 나아갈 수 있느냐다"로 기억되는 영화 '록키'를 감명깊게 봤다고 했다. 그는 "야구장을 떠나서도 나 자신과 계속 경기를 벌인다"고 했다. 할겨 안 할겨? 믿을 거냐 버릴 거냐? 희망을 가질 거냐 안 가질 거냐? 물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