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도대체 어느 별에서 왔느냐고 묻는 것 같았지요."
201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마린스키 발레단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선 열아홉 살 김기민은 당황했다. 팔다리 쭉쭉 뻗은 금발의 무용수들 시선이 자신에게로 일제히 쏠렸던 것이다. 동양인 남자가 마린스키에 입단한 것은 처음. 그러나 깡마르고 까무잡잡한 청년 김기민은 기죽지 않았다. "난 이제 '기민스키'야, 까만 피부의 힘을 보여줘야지."
그로부터 6년. 이제 김기민(25)은 세계 최고의 발레리노 반열에 서 있다. 마린스키에서 더 이상 승급할 곳이 없는 수석무용수다. 지난해 5월 '무용계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를 거머쥐었다. 강수진과 김주원이 이 상을 받았지만 한국 남성 무용수로는 그가 처음이다.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새해 포부를 묻자 그는 "이제 내 어깨가 세계 발레를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마린스키 입단 때만 해도 '난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수야'라고 스스로 주문을 외웠지만, 러시아 대표 발레단에서 주역 무용수가 되고 나니 부담이 한결 무거워졌다. "아, 이제 러시아 발레도 어깨에 지고 가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세계 최고 발레리노가 되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군무진(群舞陣)인 코르 드 발레로 시작해 무대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김기민은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묵묵히 연습에만 몰두했다. "여기서 성공하는 것은 제 꿈일 뿐만 아니라 제가 길을 터줘야 하는 모든 후배들의 꿈이기도 했으니까요." 1년 만에 정단원으로 승격했고, 다시 3년 만인 2015년 수석 무용수가 됐다.
이제 꿈이 이뤄진 것일까? 그는 "아직 멀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형(김기완 국립발레단 솔리스트)과 함께 발레를 시작한 뒤로 마린스키를 목표로 춤춰 온 김기민이지만, 아직 자기 춤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브누아 드 라 당스 상을 받고 나서 달라진 점요?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알아보는 것 같긴 해요. 하지만 저만의 춤을 위한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다는 점에선 변화가 없습니다."
그게 어떤 길일까. 그는 테크닉 면에서 "점프력이 좋고 공중에 떠 있는 체공 시간이 길며 회전 속도가 빠르다"는 평을 듣는다. 러시아 언론으로부턴 "1970년대와 1980년대 러시아 춤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한다"는 찬사도 받았다. 그러나 그에겐 기술 이상으로 성취해야 하는 목표가 있다. '나만의 해석이 담긴 춤'을 추는 것이다.
"저는 마린스키에서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돈키호테'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같은 작품의 주역으로 여러 번 섰습니다. 하지만 발레는 영화처럼 한 번 만들어지면 끝나는 게 아니에요. 같은 작품이라 해도 훨씬 깊이 있는 춤으로 계속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작품마다 다른 색깔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같은 왕자 역이라도 '백조의 호수'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춤의 느낌이 달라요. 그걸 모두 제 스타일로 만들어야 합니다."
무용평론가 장광열씨는 김기민의 성공에 대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조기 진학했을 때 그의 재능을 알아본 러시아 출신 스승으로부터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서둘러 콩쿠르에 내보내는 대신 기본기를 착실히 다졌고, 테크닉 못지않게 예술적 감수성과 창의력을 키웠다는 것이다.
김기민은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 이후인 지난 9월 발목 부상을 입었다. 이제 재활 훈련을 마치고 봄부터 다시 무대에 서게 된다. 지난해 마린스키의 스타 발레리나 디아나 비시네바와 춤을 췄을 땐 '아, 내가 몸이 안 좋다는 걸 관객이 알게 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아픔을 애써 잊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 6년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면서 가장 크게 느낀 변화는 사람들의 질문이 바뀐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 발레를 하는 그를 보고 러시아 사람들은 "일본 사람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용 공부를 하러 온 한국인 후배들에게 "너 혹시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단다. "그게 저 때문인 것 같아서 정말 뿌듯합니다, 하하."
[김기민의 세계 무대 활동]
3월엔 영국, 8월엔 스페인… 내한 공연도 추진 중
김기민은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15년 6월 그는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객원 무용수로 초청받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ABT 수석무용수 서희와 함께 '라 바야데르' 무대에 섰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김기민의 춤은 센세이션의 연속이었고, 우아하게 움직이면서도 점프와 회전의 기량이 놀라웠다"고 평했다. 이해 12월에는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BOP)에서 같은 작품을 공연했다.
올해는 3월과 6월 영국 런던, 8월엔 스페인 바르셀로나 공연이 예정돼 있다. 11월로 예정된 마린스키 발레단 내한 공연무대에 그가 설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