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범이 사용하던 아이폰의 잠금장치 해제 여부를 놓고 제조사 애플과 미국 정부 사이의 다툼이 갈수록 확전되고 있다. 잠금장치를 풀어 FBI(미 연방수사국)에 협조하라는 법원 명령을 애플이 취소해달라며 법적 대응에 나섰고, 이런 애플의 강경 대응에 대해 페이스북·구글·마이크로소프트(MS)·트위터 등 주요 IT 기업들이 지지 의사를 밝히며 가세했다. 국가 안보와 사생활 보호라는 가치가 정면 충돌하는 양상이다.
애플 변호인단은 25일(현지 시각)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 연방지방법원에 "애플이 FBI의 수사에 협조해야 한다"고 결정한 명령을 취소해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16일 이 법원은 총기 테러를 저질러 14명을 살해한 무슬림 부부의 아이폰을 FBI가 열어볼 수 있도록 애플이 기술 지원을 하라고 명령했는데, 애플은 이런 법원 결정에 불응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애플은 법원의 명령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부의 권한 남용을 제한한 미국 헌법에 배치된다고 주장한다. 팀 쿡 애플 CEO는 24일 ABC방송에 출연해 "잠금장치를 푸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많은 사람의 사생활이 침해되는 건 물론이고 해커나 전체주의 정부들이 악용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원의 명령은 암(cancer)을 만들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한번 요구를 수용하면 그다음은 수사기관이 (시민의 아이폰에 달린) 카메라를 켜는 단계에 이를 수도 있다"고 했다.
다른 IT 기업들도 일제히 애플을 돕겠다고 나섰다. 브래드 스미스 MS 최고법무책임자(사장)는 "애플을 지원하기 위한 법률 의견서를 다음 주 법원에 내겠다"고 했다. 트위터 등 다른 IT 회사들도 법률 의견서를 만드는 중이다. 잠금 해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에 대해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는 "뒷문(back door)을 만드는 건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고 했고,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도 "골치 아픈 전례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만능키'가 생기고, 이것을 누군가 악용하면 많은 사람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IT 업계가 합심해서 팔을 걷어붙인 이유는 이번 사건의 처리 결과에 따라 업체들이 큰 영향을 받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안이 유지된다는 믿음을 전제로 전개하는 각종 IT 기반 사업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안드루스 안시프 EU 디지털 시장 담당 부위원장은 "디지털 기기의 비밀번호를 제3자가 알 수 있다면 누가 전자투표를 신뢰하고 누가 전자금융을 마음 놓고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중국의 인권 운동가들은 오래전부터 애플이 중국 정부의 민간인 사찰에 협조하면 안 된다고 압박해왔다. 따라서 한번 수사기관에 협조한 전례를 만들면 중국 등 정부 통제가 심한 나라에서 매출이 뚝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애플이 계산에 넣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FBI는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제임스 코미 FBI 국장은 하원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애플이 법원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해 주요 대선 주자들도 "국가 안보가 우선"이라며 애플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게다가 잇따라 발생하는 테러에 대해 공포감을 느낀 미국인들이 애플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센터가 성인 1002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51%가 애플이 무슬림 테러범이 사용한 아이폰의 잠금장치를 풀어줘야 한다고 대답했다. 풀어주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은 38%였다. 미국 언론은 결국 연방대법원이 이번 사건의 처리 방향을 결정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