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한 명이 무대에 나와 "관객이 5분 늦는다고, 연출이 나보고 나가서 시간 좀 때우라고 한다"고 투덜댄다. 그는 "사람들은 권력에 미쳐 서로를 죽이고!"라며 분개하다 갑자기 나타난 선배 배우한테 얻어맞는다. 관객을 당황시킨 이 장면은 연극의 프롤로그. 본극(本劇)에 들어가기 전, 이 연극이 '권력의 본질'을 그린다는 걸 암시하는 맛보기 무대였다.

극단 해적의 '난세에 저항하는 여인들'(사진·연출 황선택)은 아리스토파네스가 쓴 고대 그리스 희극 '리시스트라타(여자의 평화)'를 각색한 작품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을 멈추기 위해 여성들이 남편과 잠자리를 거부하는 '섹스 파업'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매표소에 '작품의 흐름상 욕설과 선정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라고 써붙인 19금(禁) 연극. 금기(禁忌) 같은 것을 개의치 않겠다는 듯 연극은 거침없는 전복을 시도한다. 우선 원작과 달리 남녀의 성(性)을 뒤바꿨다. 근육질의 남성 배우들이 치마를 입은 채 '요염한' 몸짓을 펼치고, 여성 배우들은 칼과 창을 들고 나온다. "이 크기는 헤라클레스의 거시기랑 맞먹는다고"라는 식의 대사와 연기는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하지만 그만큼 강렬하고 재기발랄하다. 젊은 배우들은 몸을 던지듯 험한 연기를 하고, 발성(發聲)에선 만만찮은 연습량이 드러난다. 성(性)이란 결국 또 하나의 '권력'임을 드러내는 철학적 성찰이 돋보인다. 사상가 '니체'가 난데없이 전쟁터에 나타나 "충동 깊숙한 곳에 들어 있는 너희들의 권력 의지를 인정하고 행동하라"고 설파하는 데서 연극의 주제가 나타난다. '부부 사이 사랑을 가장한 책임 속에도, 지키려 하는 자와 저항하는 자에게도 모두 권력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파업을 주도한 주인공 여성은 극 후반부에서 "나는 이상적인 세상이 오기를 바란 게 아니라, 권력을 얻어서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란 것인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마침내 평화가 찾아온 결말,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 '난 후회하지 않아'가 장엄하게 흐른다. 착하고 건전한 연극만 감동을 주는 건 아니다.

▷5일까지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공연 시간 80분, (02)334-5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