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영 경제부 기자

미국 뉴욕에서 일했던 한 은행 직원은 감기에 걸린 중학생 딸을 학교에 보냈다가 선생님한테서 질책성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선생님이 "당신 딸이 기침을 심하게 한다.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설득하더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감기처럼 전염이 잘되는 병에 걸린 아이가 학교에 가면 민폐로 여긴다. 결석·지각·조퇴를 한 번도 안 한 학생에게 주는 개근상은 한국에서는 성실함의 잣대로 여겨진다. 아파도 이를 악물고 출석해야 칭찬받는다고 배운 아이는 자라서 아파도 기를 쓰고 일하러 나가는 직장인이 된다. 미국에도 더러 개근상을 주는 학교가 있긴 하지만 이는 건강하게 한 학기를 보냈다는 데 대한 격려이지 아파도 참고 버텼다는 징표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 사회를 흔들고 있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의 확산 과정을 보면 한국인에게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드러난다. 메르스에 걸려 아픈데도 환자들은 출근하고, 출장을 가고, 입사 시험을 보러 다니며 바이러스를 퍼뜨렸다. 메르스가 신종(新種) 전염병이라는 사실이 다를 뿐 전염병에 걸리고도 공공장소에 나타나는 이들을 우리는 날마다 만난다. 콧물을 흘려서 코가 다 헐어도, 눈병으로 눈이 벌게져도, 기침하느라 목이 다 쉬어도 일하러 나오는 직장인들과 우리는 자주 마주친다. 슬프게도 이들은 사명감이 아니라 나약한 인간으로 찍혔다가는 이 치열한 사회에서 낙오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힘겹게 일터로 나가 '출근 도장'을 찍는다.

1998년 처음으로 수학능력시험 만점을 받았고 지금은 미국 하버드대에서 연구 중인 오승은 박사는 "유학 갔을 때 체력과 건강에 대한 미국인들의 집착에 가장 놀랐다"고 했다. 주(州)마다 다르지만 미국은 공립학교 대부분에서 한 주에 적어도 두세 시간씩 체육·보건 관련 수업을 듣도록 규정하고 있다. 보건 수업을 통해 전염병 예방법, 심폐소생술, 건강한 생활 습관 등을 상세하게 배운다. 한국은 고등학생 중 절반이 보건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할 정도로 관련 교육이 부실하다.

보건 지식이 부족한 한국인들은 '아파도 집에서 기어나오기'가 나와 남에게 모두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문화는 건강하지 못한 국가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객관·주관적인 건강 상태를 종합해 산출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건강 지수에 따르면 한국인의 건강도는 회원국 30곳 중 25위이다. '나는 건강하다'고 답한 한국인은 35%로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이었다. 건강·체력이 부실하고 근로시간이 가장 긴 한국인의 시간당 생산성은 터키를 빼고는 가장 낮은 29위에 머물고 있다.

운이 좋아 전염병이 한국을 비켜 갈 때마다 '김치 덕분에 살았다'는 식의 근거 없는 낙관론이 퍼진다. 그러나 건강한 국민을 길러내는 힘은 탄탄한 치료·예방과 제대로 된 보건 교육이지 김치가 아니다. 무모한 정신력을 자랑삼아 아파도 이를 악물고 일하는 습관도 버릴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