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0년 4·13 총선 때 ‘DJ 민주당’ 깃발을 들고 부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투표함이 열리고 승패의 흐름이 분명해지던 그날 밤 그는 가족을 모아 놓고 “또 한 번 쌍코피가 터졌다”고 자조(自嘲)했다. 노 전 대통령은 “분열과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정치가 화합하고 어우러지는 정치에 승리하면 그 피해는 모두 힘없는 사람에게 돌아온다”며 “그런 정치를 타파해 보고 싶었는데…”라고 아쉬워했다. 나라가 영호남 지역으로 갈라선 현실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이 장면을 공개한 것은 노 전 대통령의 아들 건호씨였다.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 3학년이었던 건호씨는 아버지의 홈페이지에 ‘아버지가 지역감정 타파에 정치 생명을 걸었다가 실패해 아쉽다’고 썼다. 그는 ‘(낙선 뒤) 아버지에게 격려와 아쉬움을 전해주시는 여러분께 감사의 글을 띄운다’며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 없는 한판이었다’고도 했다. 건호씨의 글은 인터넷 공간에서 따뜻한 감동을 일으켰다. 노사모의 초기 결집에도 보탬이 됐다. 며칠 전 봉하마을의 노 전 대통령 6주기 추모식에서 건호씨가 인사말을 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앞자리에 앉혀 놓고 독설(毒舌)을 쏟아냈다. 그는 아버지와 더불어 ‘화합하고 어우러지는 정치’를 목말라하던 그 청년이 아니었다. 노 전 대통령이 타파 대상이라고 했던 ‘분열과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정치’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2009년 5월 29일 서울 경복궁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이 열렸다. 유족에 이어 이명박 대통령이 헌화 분향을 위해 일어섰을 때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이 대통령을 향해 고함을 치며 험한 말을 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한명숙 전 총리가 일어나 친노(親盧) 진영 좌석을 향해 자제를 당부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 대통령을 찾아가 백 의원이 일으킨 소란에 대해 사과했다. 이번 노 전 대통령 6주기 추모식에서 건호씨가 김무성 대표를 겨냥한 말을 읽어 내려갈 때 친노 인사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이석현 국회 부의장은 건호씨 말이 ‘콜라처럼 톡 쏘고 동치미처럼 씨∼원했다’고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배우 문성근씨는 ‘사전 상의 없이 불쑥 찾아온’ 김무성 대표가 문제를 만든 것이라고 책임을 돌렸다. 건호씨의 ‘무례’에 대해 유감을 표시한 친노 진영의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상반된 두 가지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2000년 부산에서 네 번째 낙선하고도 “농부가 밭을 탓하겠느냐. 털고 일어나야지요. 저는 이 나라와 부산을 사랑합니다”라고 했을 때 그는 지역 정서와 맞서 싸우는 ‘통합의 정치인’이었다. 현실 정치에선 깊은 나락에 빠져 있었지만 그때가 정치인 노무현이 가장 빛났던 순간이다. 2004년 탄핵 심판에서 돌아온 노 전 대통령은 “보수는 힘센 사람이 맘대로 하자는 것”이라면서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를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절반의 국민을 기득권 집단으로 몰아친 것이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집권 초반기인 2년 차인 데다 탄핵 역풍(逆風)에 힘입어 국회도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정치적 에너지가 정점을 찍던 그 무렵 노무현 정치엔 ‘분열의 리더십’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일본 고대 역사서에 ‘천지(天地)의 시작은 오늘을 시작으로 한다’는 말이 나온다. 과거를 살리고 죽이는 것은 현재의 활동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오늘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주 창조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성경 구절이 있다. 나무의 좋고 나쁨은 나무에 매달린 열매만 봐도 알 수 있는 법이다. 노 전 대통령은 세상을 떠났지만 노무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현재진행형이다. 노무현 사람들의 현재 모습에 따라 노무현에 대한 기억도 시시각각 변한다. 건호씨가 김무성 대표에게 ‘대인배’라는 반어법을 써가며 비아냥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노 전 대통령이 적진(敵陣)을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던 표정이 떠올랐다. 추모식장을 메운 친노 세력이 비노(非盧) 정치인에게 물을 뿌리고 야유를 보내는 장면은 노무현 정부 시절 완장 부대들의 야만(野蠻)을 기억나게 했다. 노무현 6주기 추모식은 노무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어둡게 색칠했다. 친노(親盧) 세력의 뿌리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노사모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즘 언행이 진정 노무현을 위하고 사랑하는 길인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