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장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곳은 흙먼지와 포연(砲煙)이 자욱한 1차 세계대전 때의 지하 벙커 안이다. 간간이 포성이 울리고, 트렌치코트를 입고 소총을 든 지친 표정의 병사들이 앉아 있다. 벙커 안에 마련된 긴 나무의자가 바로 객석이다. 배우들의 표정과 대화, 땀방울과 숨소리가 코앞에서 펼쳐진다. 나무의자 가까이 다가와 연기를 할 때는 연극에서도 클로즈업 기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올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의 최대 화제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영국에서 온 '벙커 트릴로지(The Bunker Trilogy)'다. 각각 70분 내외의 분량인 '모르가나' '아가멤논' '맥베스'로 구성된 3부작이다. 똑같은 벙커 무대에서 전개되며 남자 3명, 여자 1명으로 이뤄진 배우도 같은 사람이지만, 저마다 독립적인 스토리다.
연출과 이야기 전개는 무대만큼이나 탁월한 수준이다. 아서 왕 전설에서 모티브를 딴 '모르가나'는 동시에 입대한 친구 13명 중 3명만 살아남은 상황이다. 참호 속에서 그들은 밖에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리며 한 여인의 환상을 본다. "우린 그저 흙탕물 헤치면서 총 맞기를 기다리는 불쌍한 자식들이죠. 아니면 딴 놈들이 맞거나" 같은 대사가 빛을 발한다. 그리스 신화를 각색한 '아가멤논'에선 전장(戰場)과 가정 사이에서 파멸하는 주인공의 내면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극단적인 긴장감으로 거듭난다. 연극이란 장르가 이토록 생생하게 타인의 인생을 체험케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지난해 에든버러에서 초연됐고 올해 애들레이드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최고연극상을 받은 이 작품의 연출가는 스물여섯 살 제스로 컴튼. 그는 또래 배우들과 이 연극에 직접 출연하고 있다. 매회 120명이 볼 수 있지만, 표는 개막전 모두 동났다. 주최 측은 공연 당일 현장에서 취소표와 보조석을 소량 판매하고 있다.
▷5일까지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02)3668-0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