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남자 셋, 여자 셋이 등장해 술잔을 들고 담소를 나눈다. 미국 시트콤 '프렌즈'를 보는 듯, 그들 중엔 연인도 있고 남매도 있다. 각자 용맹한 군인이 되고, 슈바이처 같은 의술을 펼치며, 주님의 뜻을 전하고, 가수로 이름을 떨치겠다는 청운의 꿈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엘리트 청년들의 입에서 천연덕스럽게 흘러나오는 대사는 자못 당혹스럽다. "우리 조선인 핏속에 녹아 있는 그 노예근성이 경멸스러워!" "난 이제 제국에서 신민(臣民)으로 충실히 살 희망을 품고 있다!"
이 연극을 보는 관객은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주인공이 받을 만한 충격을 느낄 수 있다. 중견 연출가 박근형이 극작과 연출을 맡은 극단 골목길의 '만주전선'〈사진〉은, 앞으로 2014년의 연극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논의될 가능성이 크다. 연출과 연기·대사·무대를 모두 빈틈없이 촘촘히 짠 수작이기 때문이다.
배경은 1940년대 초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지금의 창춘). 사실상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을, 역사학자 윤휘탁은 '식민지적 상상이 잉태한 복합 민족국가'라 표현했다. '일본의 신문명을 토대로 오족협화(五族協和)의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왕도낙토(王道樂土)'라는 환상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미 일본식 개명까지 끝낸 극중 조선 청년 여섯 명은 바로 그런 꿈에 부풀어 있다. 결국 이 새로운 나라에서 일본인처럼 탈바꿈함으로써 지배층이 되고 싶다는 속물적인 욕망이다.
하지만 시청 공무원 요시에가 유부남인 일본인 상사의 아이를 밴 뒤 하루아침에 버림받고 파면당하면서, 그들의 '꿈'이란 얼마나 허위에 가득 찬 것인지 백일하에 드러난다. 그래도 이들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드시 이 아이를 낳아 (일본인으로) 키우겠다"고 다짐한다. 마지막 장면, 내레이션이 흐른다. "할아버지의 피는 아버지를 통해 내게도 흐른다"고. 그들의 모습은 1940년대의 조선과 만주에서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뼛속까지 제국의 일원이 되고 싶었던 이들의 후손이 바로 우리일 수 있다는 고통스러운 성찰이다.
▷31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시월, 공연 시간 90분, (02)6012-2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