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게 보내는 구소련 우주비행사의 마지막 메시지'(데이비드 그레이그 작, 이상우 연출·사진)는 올해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힐 만하다. 배우 7명이 연기하는 13명의 인물이 런던·에든버러·프로방스·오슬로에서 우주 공간에 이르는 16곳의 장소에서 상호 소통을 시도한다.
구(舊)소련이 발사한 우주선의 비행사 두 명은 12년째 우주 공간을 표류하며 지구와의 접속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우주비행사의 딸은 런던 술집의 무희로 살아가다 세계은행 간부인 남자를 만나 노르웨이로 간다. 이 남자는 히스로공항에서 만난 공무원에게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지 말라'고 충고하고, 그 말에서 영감을 얻은 공무원은 갑자기 사라진다. 공무원의 아내는 프로방스 산골에서 남편을 닮은 프랑스 남자를 만나는데 그는 별과 위성을 관찰하고 있다.
왕자웨이(王家衛)의 '아비정전'이나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 같은 영화처럼 여러 인물의 에피소드가 연결되며 진행되지만, 대화는 수시로 어긋나고 만남은 이내 헤어짐으로 바뀐다. 중심 줄거리가 없어서 산만하게 보일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나는 사람 안 죽여요" "스스로 죽이잖아요"처럼 여운이 남는 독특한 대사와 긴장감이 깃든 배우들의 연기가 몰입도를 높인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고해상도의 별빛을 배경으로 순식간에 시공간이 전환되는 연출도 보는 재미를 더한다.
연출가 이상우는 불교의 연기(緣起)와 힌두교의 얽히고설킨 관계망인 인드라 망(網), 김환기의 회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광막한 우주 속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 접속과 단절은 찰나에 불과할진대 자기 말만 앞세우거나 부대끼고 싸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11일까지 명동예술극장,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