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전까지 없었는데 칼날과 칼자루 사이에 피가 엉겨 있구나! 마음속에 피비린내 나는 일을 품고 있으니 헛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게지."(맥베스의 대사)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다. 막(幕)은 둥근 구멍이 무수히 뚫린 철제(鐵製)다. 그곳에 달려 있는 철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나는 굉음은 난폭한 운명의 장난을 예언하는 듯하고, 구멍 사이로 엿보이는 무대 뒤편의 광경은 인간이 지닌 헛된 욕망의 단면인 것 같다.

지난 8일 개막한 국립극단의 시즌 첫 작품 '맥베스'(셰익스피어 원작, 이병훈 연출)는 '올 상반기 가장 기대되는 연극 작품 중 하나'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셰익스피어 희곡 중에서도 워낙 짧은 작품이 '맥베스'이기도 하지만, 숨 돌릴 틈 없이 폭주 기관차처럼 이어지는 장면 전환은 작품의 비극성을 증폭시켰다. 단순화한 무대·조명·소품은 오히려 배우들 연기의 몰입도를 높였다.

지난 8일 개막한 국립극단의 연극‘맥베스’에서 맥베스 역을 맡은 박해수(아래)와 맥베스 부인 역의 김소희.

맥베스 부인 역의 김소희는 '왕이 될 운명이라는 예언을 들었다'는 남편의 편지 한 통을 읽으며 평범한 주부에서 거대한 음모를 품은 마녀로 순식간에 변모하는 모습을 소름 끼치게 표현했다. 욕망으로 불타오르는 모습 속에 어리광을 품고,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는 장면에서도 농염함을 내비치는 다층적인 연기다. 발성은 정확했고 극도의 문어체(文語體) 대사조차 어색하지 않게 소화하는 능력 역시 탁월했다.

맥베스 역의 박해수는 33세라는 물리적 나이를 훨씬 뛰어넘는 원숙함을 보였다. 다소 빠르면서도 낭랑한 대사는 '비극을 잉태한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내면'이라는 이 작품의 현대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병훈의 연출은 '권력을 찬탈하려는 야망을 품은 것'이 비극이라기보다 '권력 그 자체'가 비극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폭군 맥베스를 참(斬)한 뒤 맬컴이 스코틀랜드의 새 왕으로 즉위하는 장면은 헬멧을 쓰고 방패를 든 전투경찰 차림의 병사들이 "국왕폐하 만세"를 외치는 대단히 삭막한 광경으로 형상화했다. 막이 내려질 무렵 새로 수립되는 권력 역시 정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생이란…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결국 아무 의미도 없다"는 원작의 대사와 절묘하게 만나는 부분이다.

▷23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공연시간 120분, 1688-5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