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이 확정되면서 개장한 미국 증시는 폭락했다.
재선으로 정치의 불확실성이 걷히자 발 밑에 있던 재정절벽(fiscal cliff·급격한 재정 지출 축소와 증세로 인한 경제 충격)이 다시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7일(현지시각) 미 증시는 다우 지수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가 각각 2.4% 급락했다. 3개월 만의 최저치로, 낙폭은 약 1년 만에 가장 컸다. 8일 다우 지수는 장초반 0.1%(한국시각 오후 11시36분 기준)오르며 출발했지만 반등세는 미약했다.
CNN은 "6일 선거가 끝나자마자 미국 정치권은 재정절벽을 피하기 위한 협상에 돌입해야 할 상황에 부닥쳤다. 그러나 부자 감세 폐지 등을 두고 민주당과 공화당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어 시장 붕괴 직전까지 협상이 난항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재정절벽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도입했던 각종 감세 조치가 올해 말 끝나고, 여야의 잠정 합의에 따라 내년 1월부턴 재정 지출마저 삭감되는 상황을 말한다. 한마디로 거둬들이는 세금은 많아지고, 정부가 쓰는 돈은 줄어들기 때문에 민간 경제가 그만큼 갑자기 어려워진다.
미 의회 예산국은 2013년 재정절벽으로 미 국내총생산(GDP)의 4%에 해당하는 6700억달러(약 730조원)의 긴축이 단행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재정절벽이라는 '시한폭탄'을 해체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2개월도 안 된다.
전문가들은 재정절벽이 발생할 경우 금융위기 이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세계경제가 다시 치명타를 입을 것으로 전망한다.
JP모건은 재정절벽이 발생할 경우 2013년 1·2분기 경제성장률이 각각 -2%, -1.5%를 기록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10월 내놓은 세계 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재정절벽을 막지 못하면 미국이 총체적인 불황에 빠져들 것이며, 이후 세계경제로 그 악영향이 전이되고 증시가 침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 예산정책처는 7일 재정 긴축이 현실화할 경우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당초 전망치보다 0.5%포인트 낮은 3%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재정절벽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미 의회가 나날이 늘고 있는 정부 부채 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하면서도 시장에 충격을 줄일 수 있는 더욱 완화된 내용의 긴축안을 도출하고, 합의하면 된다.
문제는 여당인 민주당과 야당인 공화당 사이의 입장 차이가 워낙 크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부자들의 소득에 대한 세율을 올리는 등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자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공화당은 세금을 올려 받으면 기업과 개인의 경제활동이 위축돼 세수가 오히려 줄어들 가능성이 크므로, 감세 혜택은 놔두고 정부 지출을 줄이자는 입장이다.
공화당인 존 베이너 하원 의장은 오바마 당선 직후 연설에서 "초당적 협상에 착수하겠다"면서도 "경제 성장에서 비롯되는 정부의 수입 증대를 위해서 모든 사람이 낮은 세율을 적용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세금 인상에 반대한다는 기존의 입장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구성돼 내년 1월 말 출범할 새 의회의 기본 구성은 지금과 비슷하다. 하원을 공화당이, 상원을 민주당이 장악하면서 지난 의회와 마찬가지로 극도로 분열된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그린스펀 전 미 연준 의장은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대선 결과, 미국의 정치적 지형도는 전에 비해 달라진 것이 없다"며 "여전히 진행 중인 재정절벽 문제가 큰 전환점을 맞이하지 못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지난해 전 세계 시장을 요동치게 했던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이 내년 초 다시 발생하리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피치는 7일 "재정 적자 감축이 경제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AAA(최고 등급)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재정절벽
정부가 재정 적자 줄이려 가계·기업 세금 늘리고 정부 지출까지 줄여 경기추락에 직면한다는 뜻
재정절벽이란 미국의 여야 정치권이 올 연말에 끝나는 각종 세금 감면 정책에 대해 시한 연장 합의에 실패하면 내년부터 가계와 기업의 세금 부담이 급증하고 정부 지출이 자동 삭감되는 것을 말한다. 세금은 더 거두면서 정부 지출을 줄이면 경기가 급격히 얼어붙는다는 점에서 경제가 ‘낭떠러지(cliff)’에 봉착한다는 의미다.
재정절벽 문제의 뿌리는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지 W 부시 정부는 경기를 부양한다며 소득세율과 자본이득세율을 인하하는 등의 감세 조치를 단행했다.
2010년까지 한시적으로 시행될 예정이었던 여러 감세 조치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경제가 침체하면서 올해 말까지 연장됐다. 만약 별도의 연장 조치가 없으면 2950억달러에 달하는 이른바 '부시 감세'가 자동으로 사라져 사실상의 증세가 이뤄진다. 우선 소득세율이 지금의 10~35%에서 15~39.6%로 올라간다.
내년 1월부터 시행될 재정지출 자동 삭감은 지난해 8월 민주당과 공화당이 정부 부채가 더 늘어나서는 안 된다는 데 합의하면서 '2012년 12월 31일까지 의회가 별도로 합의하지 않으면 2013년부터 자동으로 지출 삭감에 돌입한다'고 약속한 데 따른 것이다.
각종 감세 조치 만료와 삭감되는 보조금 등을 합치면 재정절벽으로 인한 긴축 폭은 약 6700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