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에 노란 물이 들어차고 있었다. 광화문 글판은 이맘때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12월부터 2월까지 교보빌딩 외벽에 걸릴 문안(文案)을 고르는 선정위원회가 지난 24일 대산문화재단에서 열렸다. "대선까지는 시끌벅적할 거고 끝나면 환호와 탄식이 교차할 겁니다" "변동성이 큰 3개월이라 신중을 기해야 해요" "시치미 뚝 떼는 것도 방법입니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그것도 5년에 한 번 오는 대통령 선거. 문안선정위원들은 광화문 글판이 정치적으로 읽힐까 봐 염려했다. 선정위원 중 한 명이었던 안도현 시인은 문재인 후보 캠프로 가면서 사임했다.

광화문 글판은 삭막한 도시 풍경에 여백과도 같다. 가로 20m, 세로 8m로 신문지보다 800배 크고 천안·대전·부산·광주·제주 등 전국 7곳에 같은 문구가 내걸린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광화문 글판은 시대, 사회상황과 긴밀히 소통했다"고 했다.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걸려 있는 가을 글판“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안도현의 시‘가을엽서’의 한 구절이다〈사진 위〉. 아래는 24일 교보빌딩 회의실에서 겨울 문구 선정 회의를 진행 중인 글판 선정위원회.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읽고 싶은 대로 문구를 해석한다. 광화문 글판의 숙명이다. 2008년 봄에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빌려 "추락하는 모든 것들과 꽃 피는 모든 것들을 위해 건배!"라고 걸었더니, "왜 정권교체기에 추락이란 표현을 썼느냐"는 항의가 들어왔다. 대선 기간엔 더 예민해진다. 2007년 겨울 글판은 "어머니 저를 일찍 깨워주세요/ 모든 새해 중에서/ 내일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될 거예요", 2002년 겨울 글판은 "먼동 트는 새벽빛/ 고운 물살로/ 당신, 당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였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이다.

소설가 은희경, 시인 곽효환, 카피라이터 이지희, 노재현 중앙일보 논설위원, 윤상철 교보생명 고문, 박치수 교보생명 상무 등 문안선정위원들은 "새해를 향한 격려와 희망을 담자"고 정리하면서 표결에 들어갔다. 각자 추천하거나 공모받은 후보작 26편은 2차 투표 끝에 2편이 살아남았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에/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김종해 시 '눈' 중에서)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반칠환 시 '새해 첫 기적' 중에서)

반칠환 시인의 '새해 첫 기적'은 유머러스하고 역동적이라는 점이 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그놈의 정치가 문제였다. 한 위원이 "확대해석이지만 세 대선 주자가 완주한다는 느낌이 드는데요"라고 하자 폭소가 터졌다. 꺼림칙하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다수가 '새해 첫 기적'을 지지했다. 곽효환은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게 광화문 글판이 주는 재미"라고 말했고, 은희경은 "한 발짝 앞서가는 문학적 발상, 사유의 신선함이 있어야 글판답다"고 했다. 문구는 이번주 최종 결정되고 디자인과 제작 등을 거쳐 12월 1일 광화문 지상 10m 높이에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