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출신 첫 장관 127일…
새누리당 불모지로 떠나 전북 도지사 출마해 낙선
국회의원 나섰다 또 낙선
정부에 검역중단 주장한 건 4년전 내 약속 지킨 것
건강에 무해한건 맞지만 안전보다 '안심'이더라
돈키호테, 2003년 뉴질랜드의 키위 농가로 함께 출장을 갔던 그때나 지금이나 기자에게 '정운천' 이름 석 자는 돈키호테를 연상시킨다. 수입품에 밀려 가망이 없을 것이라던 키위 농사에 매달려 성장 산업으로 키워냈고, 최초의 농업인 출신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으로 기록되기도 했던 그는 2010년 새누리당(과거 한나라당)의 불모지인 전북에서 도지사에 출마해 낙선했고 얼마 전에는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다가 또 떨어졌다.
그를 인터뷰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다시 불거진 광우병 논란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운천이라는 인물이 시대착오의 산물인 돈키호테가 아니라, 남보다 시대를 앞서가는 돈키호테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난 15일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인근에 있는 정 전(前) 장관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런데 그의 책장 한가운데 묘한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용물은 빼내고 껍질만 남은 달걀이었다. 달걀을 세워 올려놓은 받침대 아래에는 '달걀 세례에서 대화·소통으로'라고 적혀 있었다.
2008년 6월 27일 정 장관은 대전의 농산물품질관리원 대전지원에 있었다. 원산지표시제 도입을 위해 소집한 일선기관 간담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미국 쇠고기 수입협상의 주무 장관인 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시위대 수백 명이 입구에 모여 "매국노 정운천은 물러나라"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간담회장에 들어가기까지 한 시간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양복 상의가 찢어지고 안경이 땅에 떨어져 렌즈가 깨졌다. 시위대는 간담회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다. 경찰은 안전을 위해 뒷문으로 나갈 것을 권유했다.
그는 정문으로 나가 시위대와 대화를 시도했다. 처음에는 "무슨 대화냐"며 거세게 항의하던 시위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협상에 임한 정부의 입장과 진행 과정을 설명하고, 국민에게 상세히 알리고 이해를 구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사과했다. 또 원산지 표시제 정착과 국민의 식탁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40여 분이 흘렀다. 대화가 끝나갈 즈음 한 아이가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와 건넸다. 달걀이었다. 시위대에 참가한 여성이 던지려고 준비해온 것을 아이를 통해 그의 손에 쥐여준 것이었다. 불과 보름여 전인 6월 10일, 그는 시청 앞 광장으로 나갔었다. 광우병 대책회의 주최로 열린 촛불집회에서 발언대 단상에 오르려 했다. 하지만 그날은 단상에 오르지 못했다. 갈등과 오해를 푸는 방법은 결국 대화밖에 없었다. '이것은 내게 주는 큰 선물이다.' 손에 든 달걀을 내려다보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4년 전 광우병 공포로 수십 만의 인파가 연일 서울 광화문에 모여 촛불을 들던 시절 홀로 광화문 광장으로 나갔던 남자, 젊은 시절 모두가 실패할 것이라고 말리는 키위 묘목을 들여와 국산 '참다래'로 키워낸 남자. 그는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초대 농식품부 장관을 맡았지만, 쇠고기 수입협상의 책임을 지고 6개월 만에 사퇴했다.
지난 2010년 전북도지사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떨어졌고, 지난 4·11 총선에서는 전주 완산을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다. 하지만 그가 도지사 선거에서 얻은 득표율 18.2%와 총선에서 얻은 득표율 36%는 이 지역 역대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얻은 최고성적이었다. 최근에는 미국에서 쇠고기 수입협상 4년 만에 광우병 소가 발생하자, "정부는 검역 중단 조치를 먼저 취해야 한다"고 소신 발언을 하기도 했다.
◇4년 전으로 되돌아가도 광화문 광장으로 나갈 것
―지난달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발생하자마자 정부에 대해 검역 중단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는데, 여전히 같은 생각인가.
"4년 전 '광우병 발생하면 수입 중단하겠다'고 광고까지 했는데 일단은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치는 필요하다. 약속은 약속이다. 게다가 국민이 심리적으로 불안감을 갖고 있으니 대형마트의 수입 쇠고기 매출이 급감하는 것 아닌가. 안전하다 아니다, 건강에 위협이 있다 아니다를 떠나서 4년 전 약속한 내용에 대한 최소한의 적절한 조치는 따라야 한다.
―정부는 이번에 발생한 미국 소 광우병의 경우 비정형이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이야기했다.
“안전한 것은 맞다. 하지만 국민의 심리적 불안까지 껴안아야 한다. 단순히 안전정책이 아니라, ‘안심정책’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가 4년 전 촛불에서 얻은 교훈이다. 수입 중단은 힘들겠지만, 차선으로 일단 검역 중단을 해놓고 나중에 점차적으로 푸는 절차를 밟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정부에서는 불만이었겠다.
“‘전임 장관이 가만히 있었으면…’ 하는 분위기는 있었다. 그러나 그때 발표한 장본인으로서 회피한다는 것은 내 신념상 맞지 않다.”
―이번에는 미국에서 실제로 광우병 소가 발견되었는데, 4년 전과 같은 신드롬은 없었다. 무엇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당시는 PD수첩이 만들어낸 ‘광우병 공포’가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4년이 지나면서 우리 국민이 광우병의 실체를 알게 됐고,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행동으로 옮길만한 그러한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학습이 되었다고 본다.”
―4년 전 6월 10일 촛불 시위대 수십만 명이 모여 있는데 혼자 거리로 나갔다. 단상에 올라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인가.
“소통을 못한 것에 대해 큰절 한번 하면서 사죄를 하고, 장관이 여기까지 온 이상 여러분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하겠다, 나도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딸이 있다, 국민의 안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또 농업인 출신 장관으로서 모든 것을 던져 목숨을 걸고 해결하겠다, 이렇게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에 대해 남는 아쉬움은 없나.
“협상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고 절차와 시기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캠프 데이비드에서 협상을 가진 것 등 여러 가지로 정부를 공격하려는 상대방에게 빌미를 줬던 것 같다. 2003년의 OIE(국제수역사무국) 기준과 2005년의 OIE 기준이 크게 달라졌고, 미국이 2007년 광우병 위험통제국가 지위를 획득해 협상의 조건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먼저 알리고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물론 PD수첩만 없었다면 국민을 차근차근 설득시켜갈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캠페인도 하고 시민감시단도 만들고 원산지표시제 등 후속조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PD수첩의 대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PD수첩은 대법원까지 가서 명예훼손 소송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고의성이 없다는 것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광우병 공포를 만들어낸 주요 쟁점 3가지 ▲아레사 빈슨이 광우병에 걸렸다 ▲주저앉는 소는 광우병에 걸린 소이다 ▲한국인의 94%가 광우병 걸릴 위험이 있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허위이거나 과장·왜곡이라는 판결이 났다.”
―그나마 PD수첩이 있었기 때문에 추가협상이 있었고 30개월 이상 소 수입금지가 되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지금 비정형 광우병이 발생하니까 그것이라도 의미가 있는 것 아니냐 하는데 그때 3조7000억원에 가까운 엄청난 손실 비용, 국민의 불안을 야기한 책임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다시 그 상황이 된다면 그때도 광장으로 나갈 것 같은가.
“나갈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든 연단까지 가든지, 주저앉아 버텼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당시 주저앉으면 사고 날까, 혹시 인위적으로 사고를 유발했다고 할까 봐 생각해서 밀려나왔는데 끝까지 버티지 못한 것이 아쉽다.”
―지금 정부와 국민 소통이 잘 이뤄졌다고 생각하나
“소통을 하려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배려와 공감이 가능하다. 그런 기반 위에서 서로 간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소통이 이뤄진다. 결국 신뢰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정부와 국민 간에는 그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제가 꼬마에게 달걀을 받은 것처럼 노력이 끊임없이 이뤄지면 국민의 신뢰감이 확대되고 소통이 이뤄질 것이다.”
―현 정부의 초대 국무위원으로서 정권 말에 터져 나오는 비리사건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지금은 정보가 실시간으로 계속 퍼져 나가기 때문에 덮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열어놓고 거기에 대해서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알릴 것을 알려야 한다.”
―또다시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안전이 충돌하는 이슈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쇠고기수입협상 당시는 국익을 위해서라는 논리밖에 없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불신과 불안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이 더 컸다. 국민 불신 비용이 국가 예산만큼 들어간다고 하지 않나. 국민의 불신을 해결하는 것이 국익을 위해서 굉장히 중요하다. 따로 놀 수 없다.”
―과거 수입 개방에 대응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의 제목이 ‘거북선 농업’이고, 평소에도 이순신 장군을 ‘멘토’라고 했던데.
“장군은 국가의 부름을 받으면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온몸을 다해 충성하고, 부름에서 벗어나면 아무 미련 없이 농사짓는 마음으로 돌아가신 분이다. 섬기는 자세로 백성들과의 신뢰를 몸으로 실천한 분이다. 이순신 장군이 23전 전승의 전과를 올린 배경에도 백성들과의 신뢰가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과의 신뢰와 소통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신뢰와 소통의 실험대 위에 내가 있는 것 같다.”
내게도 고등학생 아들·딸 큰절 한 번 하고 사죄하며
농업인 출신 장관으로서 목숨 걸겠다 설득하려 했다
그무렵 또다른 시위대와 양복 찢기고도 대화 40분
내게 던지려 들고 온 달걀 아이 통해 손에 쥐여주더라
키위, 국산 참다래로 살리고 외면받던 흙고구마 부활시켜
광물로 분류되던 소금도 지경부서 식품부로 관할 바꿔
지역장벽 극복모델 되고싶어 선거본부·율동팀도 없이
명망가 대신 일용직 만나 36% 득표… 희망이 보인다
◇촛불에서 희망을 보다
―지난 4년 동안의 변화를 본다면, 우리 국민은 학습에 엄청난 비용을 들인 셈이다.
“긍정적인 면을 본다면 국민의 건강과 식품 안전에 대한 눈높이가 굉장히 높아졌다. 식품 안전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질수록 산업이 발전하고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 농업에 대한 애정과 관심도 커질 수 있다. 이를 잘 활용하면 성장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 위기에는 항상 기회가 숨어 있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나.
“쇠고기 수입 협상 이후 도입된 원산지표시제 확대 시행을 들 수 있다. 한우 육우 미국산 호주산 등 원산지 표시를 아주 작은 동네 식당까지 다 표시하도록 바뀌었는데, 이것이 빨리 정착될 수 있었던 계기가 결국 촛불이었다고 본다. 지금은 전국 65만개 식당에서 시행되고 있다. 이것이 수백 년 내려온 둔갑판매를 없앴다. 일반 상황에서는 어렵다. 쇠고기뿐만 아니라 닭 돼지 김치 쌀까지 주요 품목들에 대해 전국에 걸쳐 시행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처음에는 쇠고기만 원산지 표시를 도입하려 했었나.
“애초에는 100㎡ 이상의 11만 개 정도 되는 식당이 대상이었고, 쇠고기만 원산지 표시를 확대하는 정책으로 준비됐다. 하지만 나는 이번 기회에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다음에는 기회가 없다고 봤다. 내가 광우병 때문에 책임지고 물러나는 대가로 원산지표시제 하나는 제대로 만들어 놓고 물러나겠다고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 보건복지부와 큰 마찰도 몇 번이나 빚었다. 한꺼번에 실시하는 것은 무리라면서 반대가 많았는데, 나는 전면시행을 주장해서 관철시켰다.”
―실제 효과가 있었나.
“농촌경제연구원에서 조사해보니 2년 동안 2조6000억원의 농가 소득 증대 효과가 있었다고 하더라. 수입 쇠고기를 한우로 속여 팔던 20~30%의 둔갑판매가 사라지니까 한우 수요가 늘어나 400만원 하던 한우 한 마리 가격이 700만원까지 올라갔다. 소값이 100만원 오르면 1년에 60만 마리가 도축되니까 6000억원의 농가 소득 증대로 이어진다. 그것이 200만 300만원씩 올랐으니 1조5000억원 정도 소득이 늘어난 것이다.”
―작년에는 소 가격이 폭락하지 않았나.
“그것은 공급 조절에 실패한 때문이다. 240만 마리가 적정 수준인데, 사육두수가 300만 마리를 넘어 버렸다.”
◇농업인에서 장관, 다시 정치인으로
―젊은 시절 모두가 반대하는 키위를 키우는 등 크고 작은 역발상의 사례가 많은 것 같다.
“모두가 포기한 키위를 참다래로 살려낸 것도 그렇고 시장에서 완전히 버려졌던 고구마를 흙고구마가 아닌 세척 바이오 고구마로 변신을 시켜 성장산업으로 만들어냈다. 아, 그리고 시청 앞 광장에 나간 것도 역발상인가. 모두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어쨌든 시도를 했으니까.”
―일부에서는 너무 튄다, 돈키호테라는 비판을 받지 않나.
“튀는 일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못한다. 역발상은 위기 국면을 타개하는 기술이다. 내가 전북도지사에 도전했을 때 ‘지방으로 이전하는 LH공사를 당락에 관계없이 전주에 가져오겠다’고 했다가 무산된 뒤 석고대죄한 것도 역발상이었다. 과거 왕조시대에 왕에게 행동을 보여준 것이 석고대죄였다면, 지금은 국민이 주인이니까 국민에게 뭔가 행동으로 보여줄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당시에도 낙선한 사람이 뭐 책임질 일 있다고 가서 석고대죄냐면서 다들 반대했었다.”
―진정성이 전달됐다고 보나. 도지사 낙선 때 득표율이 18.2%였고, 총선 득표율이 36%였는데, 차기를 생각하면 아주 좋은 징후다. 그 모든 것은 정치적 포석인가.
“정치적 계산을 따지기보다 내 스스로에게 당당해지기 위해서다. 내가 당당해야 내 가족을 설득시키고, 내 주변을 설득할 수 있다.”
―정확하게 157일 동안 장관으로 재임했다. 아쉬울 것 같다.
“내정자 기간을 포함해 겨우 6개월 만에 물러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나는 5000년 된 생산자 중심의 농업, 공급 부족 시대의 농업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었다. 생산 중심이 아니라 최종 소비단계인 식품산업까지 연결된 농업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생산에서 유통 가공 수출 IT 문화관광까지 포괄하는 ‘6차 산업’으로 틀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농림부가 아닌 농림식품부로 바뀐 것이다. 식품이 결합되면 고객도 농민 300만이 아닌 5000만이 된다.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이다. 다른 첨단 산업은 일자리가 많이 안 늘어나지만, 여기에는 일자리도 많다.”
―그동안 정부에서 광물로 분류해 지식경제부에서 관할하던 소금도 농식품부로 가져왔다고 들었다.
“우리의 전통식품인 된장 간장 고추장 김치 젓갈이 발효식품이다. 천일염이 반드시 들어간다. 한식 세계화 정책을 추진하는데 1963년 만들어진 염관리법에 소금이 광물로 분류돼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1만4000㏊에 달하던 염전이 모두 골프장 되고 폐염전 보상비용까지 지급됐더라. 전통을 살리려면 천일염을 식품으로 바꿔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추진했다.”
―미처 다 하지 못한 것은 뭐가 있나.
“전통주를 아직도 국세청이 허가권을 갖고 있는데 소주 맥주 위스키 말고 시골에서 나는 전통주는 식품부처 소관이 되어야 한다. 또 유럽은 광우병 파동을 크게 겪고 난 뒤 식품 안전과 관련된 것은 모두 하나로 통합했다. 지금 우리는 농식품부와 보건복지부가 크게 두 개 축이 돼서 나뉘어 있다. 예를 들어 요구르트는 식품의약품안전청 소관이고, 우유는 농식품부 소관이다. 특히 발효식품은 효소가 생물이다 보니 식약청 소관인데, 전통 발효식품을 성장시키는데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
―장관이 되기 전부터 그런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나.
“해남에서 20여년 동안 농사짓다 보니 결국은 대한민국 농업을 살리는 방법을 큰 틀에서 고민하게 되더라. 키위는 하나의 성공 모델로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키위를 다루면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니까 다른 분야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장관에서 물러난 뒤에는 어떻게 지냈나.
“매국노, ‘광우병 오적’ 이런 이야기를 듣고 물러나고 보니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았다. 최초의 농업인 출신 장관으로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100일 동안 땅을 밟아보자고 순례를 했다. 그때 마지막에 만난 것이 ‘박비향’(코를 찌르는 향기)이란 구절이다. 이 문장을 만나고 제2의 인생을 살게 됐다. 마지막 방문지로 도산서원을 찾았다가, 당나라 고승인 황벽선사의 시에 나오는 ‘뼈를 깎는 추위를 한번 만나지 않았던들 어찌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不是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라는 문장을 접한 것이다. 나도 매화 향기처럼 인생의 향기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그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을 했다.”
―총선에는 왜 출마했나.
“편하게 비례대표로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역 장벽 극복의 모델이 되고 싶었다. 지역장벽 극복 여론조사를 하면 압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그래서 한나라당 최고위원 시절부터 석패율 제도 도입을 계속 주장했다. 석패율이라는 어려운 이름보다 ‘취약지역 교차할당제’라는 이름으로 바꿨어야 했는데.”
―선거운동도 특이했다고 들었다.
“나는 정치인도 아니고 신념 하나 때문에 내려간 것이니까. 현장에서 선거의 틀도 한번 바꿔보자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당선이 됐으면 정말 대한민국 선거 문화가 확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 캠프에 선거대책본부도 없었다. 선거대책위원도 본부장도 없었다. 정말 이상한 선거운동이었다. 개소식도 하지 않았고 율동팀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몇 표를 얻었나.
“3만400표, 36%였다. 4년 전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5000표를 얻었던 지역이다. 예를 들어 대학에 찾아가도 나는 교수들을 만나지 않고 청소부, 경비아저씨, 일용직 근로자들을 만났다. 현재의 지역장벽 구도에서 명망가나 사회 활동 하는 사람들은 주위 시선 때문에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어렵다. 만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 후보는 내 동선(動線)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결국 낙선했다. 계속 떨어지고 있다.(웃음)”
지난해 말 그가 펴낸 책의 제목은 ‘바보 정운천의 7번째 도전’이었다. 그는 삼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간 것이나, 모두가 도시로 올라올 때 혼자 농촌으로 내려간 것, 또 시청 앞 광장 촛불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고 지역장벽을 깨기 위해 총선에 출마한 것 모두 ‘도전’이라고 했다. 그의 8번째 도전이 벌써부터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