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깃집 불판, 에어컨 실외기, 소화전 덮개, 맨홀 뚜껑, 철제 의류함….

남의 멀쩡한 물건에서 쇠붙이만 따로 떼어 내 고물상에 갖다 파는 '고철 절도'가 급증하고 있다. 경기 안산 단원 경찰서는 이달 초 서울 강남 지역의 의류수거함 50여개를 훔쳐 내부에 있던 헌옷을 판매하고 철제 수거함은 따로 모아 두고 있던 나모(40)씨를 구속했다. 철제 의류수거함은 최근 등장한 고철털이범들의 새로운 타겟. 부산에서도 지난해 9월 철제 의류 수거함 3개를 훔쳐 판매한 혐의로 김모씨 등 2명이 불구속 입건됐다.

고철 시세는 ㎏당 400~500원에 불과하지만 경제난으로 단돈 몇만원이 아쉬운 서민층에서 이런 유형의 범죄는 끊이지 않고 있다. 서울 은평구에선 지난 18일 도로변 하수구에 설치된 쇠 빗물받이 230여개를 훔쳐 고물상에 판매한 50대 남자가 붙잡혔고, 부산 사상구에서는 고깃집 불판 600개를 훔쳐 판매한 범죄가 발생했다. 경기도 안산에서는 다세대 주택 옥상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에서 금속판만 떼어 판 일당이 붙잡히기도 했다.

고철털이의 증가는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영국 경찰은 요즘 동상, 명판, 전선, 맨홀 뚜껑 등 돈이 될 만한 금속이라면 가리지 않고 싹쓸이하는 범죄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런던 경찰은 이달 초 금속 절도 방지를 위한 전문 태스크포스까지 꾸렸다. 유럽발 금융위기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영국에서도 생계형 범죄가 발생하고 있는 것. 최근 일부 영국 언론은 금속 절도 사건을 '(경기) 긴축형 범죄'라고 부르기도 했다. 영국뿐 아니라 미국, 뉴질랜드, 호주 등에서도 최근 고철절도(scrap theft)는 증가 추세다.

고철 절도의 기승은 국제 철스크랩(고철) 수요 및 세계 경기 침체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전 세계가 미국발 금융위기로 몸살을 앓았던 지난 2008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미국 필라델피아와 피닉스, 캘리포니아 롱비치, 클리블랜드, 멤피스, 마이애미, 밀워키 등에서 맨홀 뚜껑 및 배수관 도난 사고가 급증했는데, 당시 미국 뉴욕타임스는 "중국에서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건설 붐이 일면서 철강 수요가 급증하자 벌어진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2008년 3분기 고철 가격은 t당 533달러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고철 가격의 급상승이 전 세계적인 고철 절도 '붐'을 불러온 것. 특히 고철은 현금화가 쉽기 때문에 잘사는 나라든 못 사는 나라든 경기가 어렵고 실업률이 높아질수록 고철 절도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경기도 광주의 한 철스크랩 야적장에 쌓여 있는 고철 더미. 최근 경제난과 국제 고철 가격 상승세로 인해 지난해 하반기 이후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고철 절도가 증가추세다.

최근의 고철절도 사건은 유럽 금융위기 및 터키의 철강 수요 급증과 관계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2008년 중국이 불가사리처럼 전 세계의 고철을 빨아들였다면, 최근에는 터키가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이 때문에 터키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럽의 고철 털이 범죄가 유독 눈에 띈다는 것이다. 철스크랩 전문 매체인 '스크랩워치'의 박준영 대표는 "철을 만들 때 사용하는 고철의 90%를 수입에 의존하는 터키의 조강 생산량이 최근 매년 17%씩 증가하면서 세계 고철 수요를 끌어올리고 있다"며 "해외유가가 계속 오름세를 보이면서 중동의 건설 경기가 되살아났고, 이에 따라 인접 국가인 터키의 철강 생산량이 매년 증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격조사 기관 코리아PDS에 따르면, 고철 가격은 2008년 최정점을 기록한 이후 2009년 급락했다가 2010년 이후 지난 연말까지 상승세를 보여왔다. 코리아PDS 관계자는 "2008년 수준까지는 어렵겠지만, 다음 달쯤 가격 조정기를 거쳐 3월이면 다시 오름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코리아PDS에 따르면, 1월 현재 국내 고철가격은 t당 53만1666원으로 2008년 2분기 수준까지 회복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