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대선이 치러진 지 일주일 만인 12월 26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 안희정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친노(親盧)라고 불리어 온 우리는 폐족(廢族)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안씨는 "민주개혁 세력이라 칭해져 왔던 우리 세력이 우리 대(代)에 이르러 사분오열, 지리멸렬의 결말을 보게 됐으니 죄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썼다. 폐족은 조상이 나라에 지은 큰 죄 때문에 그 후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저주받은 가문을 말한다. 안씨는 친노 세력이 상당 기간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없게 됐고, 그런 신세가 돼도 할 말이 없게 됐다고 자탄(自嘆)한 것이다.
폐족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등장한 것은 당시 대선 결과가 친노(親盧)에게 너무나 참혹했기 때문일 것이다. 집권여당 정동영 후보가 얻은 표는 617만표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1149만표와 532만표 차가 났다. 2002년 대선 때 58만표차로 이겼던 진보 진영이 5년 만에 거의 600만표를 까먹은 결과다. 역대 최대 표차였던 194만표(1987년 대선)와 비교해 봐도 최악의 참패였다. 이회창 후보가 따로 출마해 보수 성향 365만표를 잠식한 것까지 감안하면 진보 진영의 득표는 보수진영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대선 한 달 후에 열린 진보진영 세미나에선 '전두환 시대 이후 최대 위기'라는 말이 나왔다. 그해 4월 총선서 299석 중 240석이 보수진영의 몫이 될 것이라는 자학적인 전망도 나왔다. 진보들끼리 모이면 "재집권하려면 10년이 걸릴지, 더 걸릴지…"라는 위기의식을 서로 털어놓았다.
15일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친노인 한명숙 전 총리와 문성근씨가 나란히 1·2위를 차지했다. 9명의 후보 중 두 사람의 득표율 합계가 40%다. 한명숙 대표는 "온몸을 던져 박근혜의 집권을 막겠다"고 했고, 문 최고위원은 "4월 총선서 다수당이 되면 이명박을 탄핵하겠다"고 했다. 야권 정치판에서 뛰고 있는 대선주자 중 선두는 노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 문재인이다. 2010년 6월 시·도지사 선거 때 노 전 대통령의 '좌(左)희정, 우(右)광재'가 충남과 강원에서, '리틀 노무현' 김두관이 경남에서 각각 승리했다. 대대손손 벼슬길이 막혔다던 친노(親盧)가 4년 만에 비단옷을 입고 정치 중앙무대로 속속 복귀하고 있다.
친노가 그동안 정치를 잘해서 점수를 딴 것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사람들이 정치를 너무 못하다 보니 "5년 전이 지금보다 나았던 것 같다"는 심리가 번진 것이다. 작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선 친이(親李) 대표선수 나경원은 7% 포인트 차로 졌다. 2002년 대선 때 서울에서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게 졌던 득표율 차와 똑같다. 친노가 2002년 대선 승리 5년 만에 2007년 대선서 참패했다면, 친이는 2007년 530만표차로 압승한 지 4년 만에 2002년 한나라당이 60만표를 졌을 때 판세로 돌아간 것이다. 친이도 600만표가량을 잃어버린 셈이다.
친이(親李)는 2007년 대선 승리를 거저 주운 것이나 마찬가지다. 진보좌파 10년 집권에 신물이 난 유권자들은 우파에서 어느 후보가 나와도 지지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다. 그렇게 10년 만에 우파 진영으로 넘어왔던 정권이 친이에 대한 민심(民心) 이반으로 5년 만에 다시 좌파로 되돌아갈 태세다. 이명박 대통령을 밀어 당선시켰던 우파 지지층들은 "어떻게 찾아온 정권인데…"라며 부글부글 끓고 있다.
상황이 이쯤 됐으면 친이 쪽에서 '우리가 폐족입니다'라는 반성문이 나와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 측근 누구도 미안해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친이 핵심들은 올 4월 총선에 출마하겠다며 일찌감치 대통령 주변을 떠났다. 그것도 금배지를 쉽게 달 수 있는 수도권의 한나라당 강세지역이나 영남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다. 한나라당 내 친이 세력은 박근혜 위원장이 이끄는 비상대책위원회 활동을 견제하고 있다. 몇몇 비대위원의 사퇴를 촉구하기도 했다. 비대위 활동에 이런저런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나라당을 이 지경으로 몰고 온 친이가 시시비비를 따질 처지는 아니다.
4년 전 이맘때 이명박 정권이 출범할 무렵, MB 측근들은 거칠 것 없이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자신들은 낡은 정치세력과는 근본이 다르다면서, 여의도 정치를 갈아엎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친이는 대한민국 정치를 황폐하게 만들어 놓았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줬다. 친이는 금배지 달 욕심 부리기에 앞서, 친박 비대위와 신경전을 벌이기에 앞서, 4년 전 자신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유권자들에게 "일이 이렇게 돼서 면목이 없다"고 용서부터 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