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논설위원

한나라당 사람들은 요즘 8년 전 악몽(惡夢)을 다시 꾸는 기분일 것이다. 17대 총선을 4개월 앞둔 2003년 12월 무렵 한나라당이 대기업으로부터 대선자금을 차떼기로 받았다는 검찰 수사 내용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엔 한나라당 의원의 운전기사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날 선거관리위원회의 홈페이지를 디도스 공격으로 마비시켰다는 경찰 수사가 터졌다. 수사 결과를 기다려 봐야겠지만, 한나라당은 이미 큰 타격을 입었다. 8년 전 일이 한나라당의 양심에 관한 문제였다면, 이번 일은 한나라당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만든다.

위기에 몰린 정당은 비상대책을 찾기 마련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빨리 전면에 나서 당을 이끌어야 한다는 '박근혜 조기 등판론'부터 당을 아예 허물고 새 당으로 갈아타자는 '신당(新黨)론'에 이르기까지 시나리오가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파는 원래 포장을 그럴듯하게 바꿔치는 이벤트에 서툰 데다, 그런 눈속임에 넘어가 줄 유권자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싶다면 내용물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유권자들의 심장 박동 수를 높여줄 대선 주자가 '짠' 하고 등장해 준다면 좋겠지만 동화 속 얘기다. 패색(敗色)이 짙게 드리운 전장(戰場)에 나서면서 장수를 교체할 수 없으니 병사들이라도 대폭 교체하자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한편에선 국민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새 인물 영입을 주장하고, 다른 편에선 국민들이 총선 후보를 정하는 오픈 프라이머리 도입을 주장한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현실로 옮기려면 곧장 벽에 부딪힌다. 오픈 프라이머리를 하는 미국에선 현역이 재공천을 받는 확률이 90% 이상이다. 한나라당에 대한 밑바닥 정서가 험악한데 한나라당 간판으로 선거에 나서겠다는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공천 물갈이를 하다가 현역 의원들이 반발하며 육탄전이라도 벌어진다면 볼썽사나운 구경거리일 것이다.

이런저런 장애물을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한나라당 공천으로 비교적 쉽게 당선될 수 있는 지역의 현역 의원들이 자진해서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7% 포인트 차이로 완패한 서울시장 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이긴 국회의원 지역구는 강남 갑·을, 서초갑·을, 송파갑·을, 용산 등 7곳이었다. 최근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12% 포인트 밀리는 양자 대결 조사에서 박 전 대표는 호남과 수도권에서 크게 지고, 충청·부산·강원에서 박빙 우세 내지 접전이었다. 반면 대구·경북에서는 63% 대 30%로 두 배가량 크게 안 원장을 앞섰다. 대구·경북의 지역구는 모두 27곳이다. 어떤 정치 상황 속에서도 한나라당 간판만 달면 당선이 보장되는 지역구가 30곳 남짓 된다는 얘기다.

정당에서 비례대표 공천을 두 번 주는 일은 극히 드물다. 비례대표는 개인이 득표 활동을 벌여 당선되는 선출직보다는 당의 임명에 따라 당선되는 임명직에 가깝기 때문에 임명직 혜택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강남권, 대구·경북 지역 의원들도 이런 분류법대로라면 임명직에 포함돼야 할 것이다.

2004년 총선 때 한나라당은 차떼기 대선자금과 탄핵 역풍으로 한때 50석 미니 정당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극단적 위기에 몰렸었다. 그랬던 한나라당이 121석을 건지면서 그나마 선방(善防)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26명의 현역 의원들이 스스로 불출마를 선언한 것도 한몫을 했다. 5선의 정창화 의원이 "별로 남긴 것도 없이 너무 오래 있었다", 3선의 박헌기 의원이 "내 시대적 역할은 끝났다"며 정치판을 떠나는 모습은 긴 잔상(殘像)을 남겼다.

4개월 후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언론에서 많이 쓰는 용어를 빌리자면 그냥 패배냐, 완패냐, 참패냐의 갈림길 앞에 서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가령 한나라당 강세 지역이면서 공석(空席)이 된 서울 강남 을, 양천 갑 지역구를 놓고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들끼리 머리를 치받고 싸운다면 참패로 가는 길이 열린다. 반면 서울 강남권과 대구·경북 의원들 상당수가 당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한나라당 사람들은 자기 욕심 채우기에 바쁘다'는 국민들 생각도 어느 정도는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친박(親朴)을 중심으로 한 신주류 의원들이 그런 선택을 한다면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지금의 한나라당호(號)는 내년 4월 총선이라는 목적지까지 운항이 어려운 상태다. 배가 가라앉는 것을 막으려면 적잖은 인원이 스스로 내려설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