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한예슬의 '스파이 명월' 촬영 파업 사태는 톱스타의 책임의식 부재라는 측면과 더불어 한국 드라마 제작 시스템의 후진성도 함께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시스템의 개선 없이는 앞으로 언제든 제2, 제3의 한예슬 파문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방송사도 자인하는 후진 시스템
KBS는 16일 발표문에서 "스파이 명월은 '다른 드라마 촬영'과 비교해 쪽대본이나 살인적 스케줄은 분명 아니었다"고 했다. 뒤집어 보면 '스파이 명월'은 아니지만 다른 드라마는 '쪽대본과 살인적 스케줄'로 제작되고 있음을 방송사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현재 드라마 제작 시스템의 후진성을 상징하는 말이 '쪽대본'이다. 당일에 찍을 수 있는 분량 정도만 나온 대본을 일컫는 말이다. 대본은 드라마가 전파를 타기 2~3주 전 책의 형태로 된 완성본이 나와야 정상적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 회분이 3~4개로 쪼개져 나오는 건 보통이고, 심지어 연기자들이 촬영하고 있는 중에 작가가 대본을 바꿔 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어떤 작가는 당일 촬영분 대본을 한두 쪽씩 나눠 이메일 등을 통해 촬영장에 보내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배우·제작진은 극의 전개 맥락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일단 연기하고 촬영하는 일이 다반사다. 한 예로 얼마 전 한 사극 촬영장에서는 배우·스태프들이 앞뒤 사정도 모른 채 여주인공이 무조건 왕과의 잠자리를 거부하는 장면을 찍었다고 한다.
쪽대본은 무리한 촬영 스케줄을 낳기 마련이다. 한예슬측은 얼마 전 "오전 2시쯤 끝나야 할 촬영이 오전 5시에 끝나고, 다시 오전 7시에 첫 촬영을 한다고 해 기가 막혔다"고 했었다. 한예슬의 헤어드레서를 자칭한 사람은 17일 트위터에서 "(한예슬은) 2주 동안 밤을 새우고 기어가듯 집에 들어가 걸을 힘도 없이 잠시 소파에 기댔다 기절했다. 그러다 보니 (촬영시간에) 늦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연급 탤런트들의 경우 촬영장에서 이틀이나 사흘씩 대기하기도 한다.
최근 종영한 MBC '최고의 사랑' 주인공 공효진은 한 인터뷰에서 "촬영장은 지옥이었다"고까지 했다.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밤샘으로 촬영이 진행됐고, 잠은 세 시간 정도밖에 못 잤으며 쪽잠이라도 자기 위해 수면제까지 먹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나는 당일 방영될 장면을 그날 오전에, 상대배우(차승원)는 그날 오후에 찍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촬영 전권을 쥔 PD들의 문제도 거론된다. '스파이 명월'의 한 출연 배우측은 최근 "PD가 대본보다 많은 분량을 찍어놓곤 정작 방송에 내보내지도 않는 경우가 많았다"며 "상당수 출연진이 이에 대해 불만이 컸다"고 했다.
이 같은 '생방송식 촬영'은 잦은 방송 펑크를 낳고 있다. 주연배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곧바로 결방(缺放)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주연 정우성과 박신혜가 교통사고를 당하자 곧바로 방송을 내보내지 못했던 SBS '아테나'와 MBC '넌 내게 반했어'이다. 2007년에는 탤런트 유동근이 SBS '왕과 나'에 출연 중이었던 부인 전인화가 대본이 늦게 나와 녹화장에서 고생한다는 이유로 제작진과 거칠게 부딪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시청률에 목매는 구조 개선돼야
원로배우 이순재씨는 16일 한예슬 사태와 관련해 "배우는 어떤 이유에서든 현장을 떠날 수 없다"면서도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제작여건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묵은 숙제지만 방송 관계자들은 '사전 제작 시스템'의 조기 도입이 해법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방송사 PD는 "시청자 반응에 따라 드라마 전개와 결말이 바뀌는 우리 드라마 현실에서 사전제작은 아직은 무리"라고 했다. 실제 '로드넘버원'(2010·MBC) '파라다이스목장'(2011·SBS) 같은 사전제작 드라마들이 대부분 시청률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렇다 해도 "지금의 시스템이 계속되면 공멸로 이어질 것"(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김승수 교수)이라는 지적이 많다. 김 교수는 "방송사들이 정책적으로 드라마 횟수를 줄이고 제작 관행을 바꾸는 등의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드라마의 질이 갈수록 떨어져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고 드라마 시장도 큰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