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일 논설위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최근까지도 성인(聖人) 후보자가 죽은 지 50년이 지나야 비로소 그의 일생에 대한 평가를 시작했다. 조선시대 어떤 양반가문은 선대(先代)가 사망한 지 3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그의 삶을 적은 묘비를 세우지 않았다. 객관적인 평가는 흥분과 과장된 묘사가 가라앉아야 가능해진다는 생각에서다.

세계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미국 CIA마저 길거리 시위대의 편에 설 것인지, '30년 친미파(親美派)'인 무바라크를 옹호할 것인지 갈팡질팡하고 있던 지난 5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뮌헨 국제안보회의에서 말했다. "(세계 역사에서) 혁명은 으레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워 독재정권을 쓰러뜨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민주화의) 과정이 또 다른 독재자에 의해 강탈당하는 것을 목격하곤 합니다. 그 독재자는 폭력과 기만 술책을 쓰고,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선거를 악용합니다."

앞으로 이집트는 클린턴 장관의 우려가 빗나가길 바란다. 그러나 독재자를 쫓아내는 데 성공한 이집트 혁명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역사의 편에 선다'고 할 때 그게 무엇이어야 하는지 곰곰 생각하게 된다. 무바라크가 대통령궁을 도망치듯 빠져나가고 카이로가 환호와 기도로 들끓던 날 온 세계 언론은 '시민혁명의 승리'를 흥분된 목소리로 타전했지만, 필자는 그걸 '승리'라고 부르지 못했다.

흡사 점령군 같은 시위대 연합조직(청년혁명동맹)의 요구사항은 꽤 길다. 무바라크 형사소추, 발포명령자 체포, 정치범 석방, 비상조치법 즉각 폐지…. 군부 실세(實勢)들도 각군 사령관과 합참의장을 포함하고 국방장관이 위원장을 맡는 '18인 최고군사위'를 만들고, 의회해산·헌정중단·선거일정 보장·제헌위 구성 등 화려한 개혁공약을 발표하는 한편, 자신들이 국내·외에 이집트를 대표한다고 못박았다. 하루빨리 민간인들로 대통령위원회를 만들어 모든 권한을 넘기라는 야권의 요구에는 묵묵부답이다.

이집트는 이제 구헌법은 중단됐으나 새 헌법은 없는 '황혼지대'에 들어섰다. 은행은 오늘도 파업으로 마비상태고, 국영방송국은 시위대에 둘러싸여 있으며, 악명 높았던 시위탄압 경찰 2000여명이 자신들의 임금인상 시위를 벌이는 웃지 못할 일마저 벌어지고 있다. 노천 텐트를 걷지 않은 일부 시위대들은 "무바라크의 뒤를 따라 잔당(殘黨)들도 모두 떠나라. 모든 썩은 생선의 머리는 잘라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서방 지도자들은 이집트 수뇌부에게 '질서 있는 권력이양(orderly transition)'을 촉구해왔다. 그러나 그걸 할 수 있는 정치적 실력이 있다면 이미 선진국이다. 30년 장기집권에 국민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청년들의 대량 실업으로 '담벼락에 기대선 백수들'이 절망의 벼랑 끝에 매달려 있으며, 군부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대권의 향방이 결정되는 나라에서 '질서 있는 권력이양'을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주문 아닌가.

게다가 중동에서 오랫동안 '미국의 친구'를 자임해왔던 아랍 지도자들은 오바마가 무바라크를 너무 쉽게 버렸다고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클린턴 장관의 고민은 좀더 깊은 곳에 있는지 모른다.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촉발된 혁명이 '통제 불가능한 혁명'이 됐을 때 아랍과 중동은 물론이고 온 세계가 떠안아야 할 질서 재편의 뒷감당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