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 차량관리실 소속 운전기사 김종욱(40)씨는 지난 2월부터 동료 20여명과 함께 영어 스터디그룹을 만들었다. 김씨는 "우리가 태운 외국인 바이어들과 영어로 말하면 인력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필요성 때문에 공부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2008년 '사내 영어 공용화(公用化)'를 선언한 LG전자는 회의와 보고서에 이어 이렇듯 전 사원을 대상으로 공용화를 확대하고 있다.

'영어 공용화 논쟁'이 제2라운드에 접어들었다. 10여년 전 이 문제가 처음 공론화됐을 때만 해도 학자들 사이의 갑론을박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동안 필요에 따라 영어 공용화를 선언하는 기업·대학들이 늘어났고, 28일 안민정책포럼과 연세대 글로벌교육포럼이 개최한 세미나에서는 "몇몇 거점을 중심으로 간접적인 공용화 확대를 해 나가야 한다"는 구체적인 '우회 전략'이 제시됐다.

학자들 '논쟁'에서 기업·대학 '실천'으로

영어 공용화 논쟁이 촉발된 것은 IMF 사태 직후인 1998년 작가 복거일씨가 저서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에서 이를 주장하면서부터였다. 복씨는 "영어는 이제 앵글로색슨족(族)만의 언어가 아니라 '지구제국'의 언어"라며 "영어를 쓰지 않아 생기는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영어 공용화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부터 격렬한 사회적 논쟁이 벌어졌다. 국어학자 남영신씨는 "공용어인 영어만 잘하면 된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의 상실"이라고 했고, 국문학자 최원식 인하대 교수는 "서구 패권주의의 연장이며 미국의 시장주의를 이식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문학비평가인 정과리 연세대 교수는 "사실상 국제어가 된 영어를 다음 세대가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의무"라며 옹호했다. 정치학자인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 원장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영어를 도입한다면 오히려 한국문화를 보편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이후 논쟁은 일단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듯했지만, 국제화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점차 공용화가 '현실'의 문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LG전자와 삼성전자·SK·두산 등의 대기업이 영어공용화 대열에 참여했는데, 국내외 사업장에서 고용하는 외국인 인력의 규모가 커지면서 소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천부산·진해 같은 경제자유구역에서도 영어 공용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서는 포스텍과 울산과기대가 영어 공용화를 전격 선언해 대학가에 충격을 가져왔다. 포스텍은 강의와 논문, 회의부터 기숙사, 식당 메뉴까지 모두 영어를 사용하는 강도 높은 공용화를 내세웠다.

"거점 세워 공용화 확대" vs "조급하게 추진하면 부작용"

28일 안민정책포럼 등이 개최한 '한국의 영어 상용화' 세미나에서 모종린 연세대 교수는 주제발표를 통해 "해외 사례를 분석해 보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홍콩은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중국어로 가르치는 학교와 영어로 가르치는 학교를 함께 두는 '이원(二元) 교육 시스템'을 유지했다. 공공부문과 방송 등에서도 중국어와 영어가 동시에 공용어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힘썼다.

역사적으로 영어권과 전혀 무관했던 핀란드는 1995년 부분적인 영어 몰입교육을 도입하면서 국민의 영어 사용을 유도했다. 노키아 같은 기업이 영어를 사내 공식 언어로 지정했고, 스톡만 백화점은 외국어 하나를 잘할 때마다 월급을 5%씩 인상했다. 홍콩과 핀란드 모두 '실제로 영어를 쓰는 환경'을 만들었던 것이다.

모 교수는 "단일 언어 사용국이면서 영미권 식민지 경험이 없는 우리나라에선 영어 공용화에 대한 부정적 정서가 적지 않다"며 "기업·대학 등 영어에 대한 실질 수요가 있는 기관을 중심으로 공용화를 확대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장기적으로는 홍콩·핀란드처럼 영어 몰입교육을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영어 방송을 확대해서 공용화에 근접하자는 구상이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국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조급하게 공용화를 추진한다면 큰 부작용이 일어날 것"이라며 "영어에만 몰입하는 것보다는 한자교육 등 국제화의 시야를 넓힐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