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국가의 기관이면서도 어떠한 정치적 압력으로부터라도 초연할 수 있는 참된 국민의 기관으로 내외에 그 구조적 우수성을 자랑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1950년 6월 12일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인 한은의 창립 기념식에서 구용서(具鎔書) 초대 한은 총재가 한 말이다.

광복 후 각종 물자 부족으로 물가가 급등하는 혼란 속에서 정치권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고 통화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중앙은행의 설립이 시급했다. 하지만 통화 정책 전문가는 부족했다. 때문에 일제 시대에 중앙은행 역할을 했던 조선은행에서 한국인으로선 가장 높은 지위인 지점장에까지 올랐던 구용서씨가 초대 한은 총재를 맡게 됐다.

구 전 총재는 1925년 도쿄상대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행, 도쿄지점·오사카지점 등에서 일했다. 광복 후에 국내에서 일본인들이 물러나자 그는 1945년 조선은행 부총재가 됐으며, 1950년 총재 자리에 올랐다.

구 전 총재는 정치적 중립성, 기술적 전문성 등을 강조하면서 제대로 된 중앙은행을 만들겠다고 천명했지만 당장 눈앞에 떨어진 불똥을 치우느라 동분서주하게 된다. (첫 금융통화운영위원회를 묘사한 그림. 오른쪽 다섯번째가 구용서 초대 한은 총재.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최순주 당시 재무부 장관) 창립 13일 만인 6월 25일에 6·25 전쟁이 났기 때문이다.

한은은 중앙은행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화폐 발행도 하지 못한 채 금고에 있는 금·은 등을 안전지대로 옮겨야 했다. 전쟁으로 철도가 마비된 상태에서 구 전 총재는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을 급하게 만나 지원을 요청했다. 군(軍)은 극비리에 6월 27일 오후 2시 한은 서울 본점에 트럭 1대를 보냈다. 한은은 금고에 있던 순금 1070kg, 은 2513kg을 상자 89개에 나눠 담아, 헌병 20명의 호송을 받으면서 진해 해군통제부로 이송했다. 한강 다리는 28일 폭파됐다.

구 전 총재의 다음 임무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한은은 본점을 6월 28일 대전, 7월 16일 대구, 8월 22일 부산으로 옮겼다. 그 와중에 6월 29일 일본에 새 화폐의 인쇄를 요청했고, 미 군용기 편으로 운송해 7월 22일 대구에서 화폐 발행에 성공했다.

구 전 총재는 취임 1년 6개월 만인 1951년 12월 18일 퇴임했다. 그 후 관운(官運)이 뒤따라 1953년 대한석탄공사 총재, 1954년 산업은행 초대 총재, 1958년 상공부 장관을 역임하게 된다.

역대 한은 총재의 평균 임기는 2.2년이다. 법에 보장된 임기는 4년이지만 각종 정치적 외압에 자유롭지 않았다. 1997년 말 한은의 중립성을 명시한 한은법 개정 이후 취임한 전철환, 박승 총재는 4년 임기를 모두 마쳤다. 이성태 현 총재도 오는 31일 4년 임기를 마치고, 제24대 총재로 김중수 OECD대사가 임명돼 한은을 이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