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4 후퇴 이후 나는 대전에서 피란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이 열일곱. 그해 여름 미군에서 통역 일을 하던 둘째형 소개로 미 3사단 7연대 중화기중대에서 일하게 됐다. 군부대에선 트럭에서 기름통을 내리고, 포탄을 나르는 등 허드렛일을 했다. 그 중대에는 나 같은 10대 후반 젊은이가 10여명 있었고, 우리는 미 3사단을 따라 연천·철원·포천·동두천 등을 다녔다. 월급을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됐다. 미 3사단이 한국군 1사단에 담당 지역을 넘겨주고 후방으로 빠질 때 우리는 101사단으로 불리는 비전투 부대로 편성돼 한국군으로 넘어갔다. 나는 102연대 2대대 10중대 1소대에 배속됐다. 우리는 누비옷과 누비장화를 배급받고 연천 서북방에 배치됐다.

도착한 임진강 서쪽 지역에서는 국군 1사단 15연대와 인민군 간 고지 쟁탈전이 한창이었다. 아군 진지가 있는 고구마분지 옆으로 베티고지·바블고지(일명 밥알고지)·소노리고지(일명 소노루고지)·대노리고지(일명 대노루고지)가 강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대노리고지와 315고지·105고지 등 고지대를 차지한 적군은 아군에게 수류탄과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우리의 임무는 아군을 보호할 수 있도록 교통호(참호와 참호 사이를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판 호), 철조망 등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작업은 적군의 감시를 피해 밤에 이루어졌다. 어둠이 깔리면 우리는 야전삽 한 자루만을 들고 전쟁터 가운데로 나섰다.

6·25 전쟁 당시 군수품을 운반하기 위해 창설된 노무부대 대원들이 솥과 쌀가마니 등을 지게에 지고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인민군이 빤히 내려다보는 지점에서 교통호를 팠다. 방망이 수류탄과 총알을 피하기 위해 미친 듯이 땅을 파내려가 그 안에 숨었다. 손발이 얼어붙는 겨울이었지만 삽으로 언 땅을 5~10cm 정도 걷어내면 말랑한 땅이 나왔다. 삽을 뜨는 족족 잘린 손발이 나왔다. 작업을 하다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잽싸게 교통호에 숨었고, 사방이 조용해지면 다시 시신을 헤집으며 땅을 팠다. 아군 진지와 진지 사이 폭 30m 계곡을 지날 때도 적지에서 총알이 날아들었다. 우리는 "뛰어"라는 신호에 맞춰 전력을 다해서 뛴 다음 미리 깔아둔 모래판으로 미끄러졌다. 하루에 몇번씩 계곡을 지날 때마다 총알이 몸을 스쳤고, 생사가 오갔다. 국을 운반하는 동료가 총에 맞는 날이면 베티고지 병사들은 꽁꽁 언 주먹밥을 토끼처럼 갉아먹었다.

1951년 12월 중순 적군이 내려와 베티고지의 아군을 고립시킬 위험이 있으니 철조망을 쳐서 계곡을 막으라는 명령이 있었다. 30여명이 작업을 하는데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임진강 건너의 아군이 우리를 향해 박격포·직사포·기관포를 난사했다. 인민군 역시 야포와 총알을 쏟았다. 조명탄이 달처럼 훤했고 총알은 비처럼 내렸다. 춘천중학교 시절 학도호국단에서 '포탄은 같은 자리에 두번 떨어지지 않는다'고 배운 것이 생각났다. 박격포탄이 갓 떨어져 움푹 팬 자리로 뛰어가 납작 엎드렸다. 폭발의 뜨거운 열기가 후끈 올라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조명탄이 나무에 빗맞아 꺼지자 우리는 고구마고지의 탱크길로 달려갔다. 정신없이 뛰는데 미군 탱크가 앞길을 막았다. 포신이 그르렁거리며 우리를 향했다. 탱크 위로 뛰쳐 올라가 동료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사우스 코리아 솔저, 사우스 코리아 솔저"를 외쳤다. 그제야 탱크가 멎었다. 나중에서야 그날 밤 인민군이 철조망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작업 중임을 알고도 아군이 포를 쏘았다는 것을 알았다.

1951년 12월 24일 오후 임진강 서쪽 315고지 하늘에는 빨강·노랑·파랑의 낙하산 수십개가 펼쳐졌다. 수송기가 떨어뜨리고 간 낙하산에는 미군이 적군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선물 박스가 달려 있었다. 그러자 적이 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해 왔다. 다음날 25일 오후 105고지 쪽으로 출동했다 들어오는 아군이 계곡 나무에 매달려 있던 등짐 세 꾸러미를 가져 왔다. 적들이 우리에게 보낸 물건들이었다. 아군은 팥시루떡·담배·수건·칫솔·치약 같은 중국산 물건을 나눠 가졌다. 누르스름하고 두꺼운 중국산 궐련 두 개비가 내 손에 떨어졌다. 연기가 적에게 노출되면 총알이 날아들까 봐 교통호에 숨어서 천천히 태웠다. 한 모금 피우고 끄기를 반복, 담배 두 개비를 1주일 동안 피웠다. 다른 물건은 내 몫이 아니었다. 그리도 먹고 싶었던 팥시루떡은 부스러기도 받지 못했다. 내가 현역병이 아닌 부대의 노역을 담당하던 101부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12월 말쯤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다. 1952년 1월 1일 새벽 1시에 고구마능선을 따라 105고지 앞 초소까지 맨몸으로 내려가라는 지시였다. 105고지는 밤에는 인민군이, 낮에는 아군이 점령하는 곳이었다. 작전 전날인 31일 낮 벙커에서 자다가 부모님이 고구마고지에서 임진강을 바라보며 절하는 꿈을 꾸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다음날 새벽 동료 2명과 함께 눈길을 헤치며 105고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상한 감각에 돌아본 순간 지뢰가 터졌다. 배운 대로 지뢰가 폭발하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능선 아래 계곡이었다. 능선에서 신음 소리가 들리기에 기어올라 갔다. 뒤따라 오던 황해도 출신 친구는 하늘을 향한 채 눈을 허옇게 뒤집고 있었다. 제일 끝에 오던 경상도 출신 친구는 광대뼈가 보일 정도로 얼굴이 헤어진 채 끙끙댔다. 정신없이 위생병을 외치다 다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의정부의 야전병원이었다. 파편이 내 오른쪽 팔관절과 발가락, 목 뒤에 박혔다고 했다. 병원에서 4개월간 치료받은 후 1952년 4월 1차 귀향 명령을 받았다.

이 모든 기억이 내 군번 K17001671처럼 머리에 선명하다. 황해도 출신 내 친구는 베티고지에서 철조망을 치던 중 지뢰를 밟았다. 들것이 없어 친구를 막대기에 돼지처럼 둘둘 매달아 절벽길을 내려왔다. 파편에 팔·다리가 덜렁거리는 상황에서 친구는 "고향 황해도 사리원에 계신 부모님께 내가 이렇게 죽었다고 꼭 전해달라"고 했다. 나는 "걱정하지 마. 죽지 말고 살기만 해"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지금도 친구는 내 꿈으로 찾아와 고향에 자신의 소식을 전해달라 부탁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는 울면서 잠에서 깬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내가, 또 우리가 나라를 위해 몸바쳤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사연을 기다립니다.
보내실 곳 :
이메일은 625@chosun.com.
우편은 (100-756)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조선일보 독자서비스센터 '나와 6·25' 담당자 앞.
문의는 1577-8585.

[특집] 6ㆍ25전쟁 60주년 '나와 6ㆍ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