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장님, 기억나십니까. 중공군을 생포해오라며 신문지에 거금 10만원을 싸서 가져오셨던 일 말입니다."

"충성! 연대장님, 저는 2대대 통신병이었습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5일 낮 서울 성수동 한 식당에 노병(老兵) 34명이 모였다. 이들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강원도 김화군 '저격 능선'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육군 2사단 32연대 소속 장병들이다. 42일 동안 교전을 벌인 저격능선 전투에서는 중공군 1만1000여명(추정치)이 숨지고 국군도 1100여명 희생됐다.

5일 서울 성수동 한 식당에 6·25에 참전했던 육군 2사단 32연대의 당시 연대장부터 사병들까지 참전용사 34명이 모였다. 이 자리엔 32연대 이돈태 대위(왼쪽)도 참석해 노병 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연대 이름을 딴 '32전우회' 모임은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연대장부터 사병까지 연락이 닿는 모든 전우를 전국에서 불러 모았다. 연대장이었던 유근창(84) 예비역 중장(전 원호처장)은 최근 무릎 관절수술을 받았지만,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 박수를 받았다. 대대장이었던 이대용(85) 예비역 준장을 포함해 32연대 출신으로 '별'을 단 예비역 장군 4명도 참석했다. 32전우회 정영하(78) 회장은 "장교, 부사관, 사병이 함께 모이는 6·25 전우 모임은 우리가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60년 전 무용담 이야기꽃 피워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戰場)을 누빈 20대 젊은이들이 어느새 머리가 벗어지거나 백발인 노인들이 됐다. 전역 후 회사원, 교사, 은행원, 공무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지만, 이젠 모두 은퇴했다. 이들은 연대장과 대대장에게는 상관에 대한 예우를 다했지만, 나머지는 계급을 떠나 "김형, 이형"으로 편하게 부르는 친구 사이가 됐다.

노병들은 전우들과 자리에 앉자마자 58년 전 전장으로 돌아간 듯 무용담을 주고받았다. 경기 안양에서 올라왔다는 이성제(76)씨가 "주먹밥을 먹다 오줌 누러 일어난 자리에 포탄이 떨어져 살아났다"고 하자 박장대소가 터졌다. 최고령자 강대현(91)씨가 큰 목소리로 "건배"를 외치자, 노병들은 잔을 높게 들었다. 고향이 평양인 강씨는 "6·25 때 31살이라 군대에 갈 필요가 없었지만 인민군을 무찌르고 고향에 금의환향하기 위해 자원 입대했다"고 했다.

6·25전쟁에 참전한 2사단 32연대 노병들이 공개한 전쟁 당시 모습이 담긴 사진. 이중 3명이 5일 모임에 참석했다.

왁자지껄하던 노병들은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고 먼저 가신 전우들을 기억하자"며 묵념을 할 때는 모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32연대장이었던 유근창씨는 "우리는 반세기 넘게 함께 살아온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통일은 못 이뤘지만 우리가 목숨 바쳐 싸웠기 때문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대부분 80대가 된 노병들의 몸은 온전치 않았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김종열(80)씨는 "소대장으로 배치받은 뒤 한 달 만에 다리에 관통상을 입어 죽을 고생을 했다"고 했다. 마산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올라온 배종신(78)씨는 "전쟁 중에 머리를 다쳐 양쪽 고막(鼓膜)을 모두 잃었지만 전우를 만나러 먼 길을 마다 않고 왔다"고 했다.

첫 모임 16명 중 7명이 고인돼

32전우회는 지난 1985년 16명이 첫 모임을 가진 뒤 25년째 계속되고 있다. 1983년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본 정영하씨가 '이산가족도 만나는데 전우끼리 못 만날 이유가 없다'며 연락처를 수소문한 끝에 모임이 이뤄졌다.

노병들은 1년 네 차례 정기모임뿐 아니라 수시로도 만난다. 예전에는 자식들 결혼식에 참석했고, 요즘은 손자들 결혼식에 모인다. 김원택(82)씨는 황규창(81)씨 아들 셋 가운데 둘의 주례를 서줬다. 김씨는 주례사에서 "나와 신랑 아버지가 수십 년 잘 지내고 있으니 너희들도 우리처럼 오래오래 잘 살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부동반으로 해외여행을 가기도 한다. 전우들이 세상을 떠나면 상가에 모였다. 벌써 첫 모임 회원 16명 중 7명이 고인(故人)이 됐다.

이들은 32연대 창설 기념일에는 꼬박꼬박 강원도 양구의 친정 부대를 찾아 후배 장병들에게 6·25 당시 전투상황을 전해준다. 현역 후배들도 32전우회 모임 때 참석해 부대 소식을 전한다. 이날도 노병들은 후배들이 보내준 훈련모습이 담긴 영상자료를 보며 즐거워했다. 32연대 이돈태 대위는 "생사를 넘나든 전우들끼리 지금껏 만나오신다니 후배로서 가슴 벅차고 숙연해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