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체류 중인 러시아인 숫자가 1만명에 육박하면서, 러시아 정부가 "서울에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우리 정부와 서울시에 줄기차게 호소하고 있다. 정교회는 러시아 국민 열 명 중 아홉 명이 믿는 실질적인 '국교'다. 정부와 서울시는 "불가능하다"고 난색을 보이고 있지만, 러시아는 "서울 성당 건립은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지난 7월 31일 글레브 이바셴초프 당시 주한 러시아 대사가 이임을 앞두고 오세훈 서울시장을 예방했다. 서울시가 작성한 면담 기록을 본지가 단독 입수한 결과, 이 자리에서 이바셴초프 대사가 "2010년은 한·러 수교 20주년이자, 러시아 정교가 한국에 전래한 지 100년 되는 해"라며 "서울에 적당한 장소가 없으면 옛 러시아 공사관 자리에 조그만 예배당이라도 지을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청했다. 옛 러시아 공사관(사적 253호)은 1896년 명성왕후가 시해된 뒤 고종이 피신했던 건물로, 공사관 옆에 정교회 성당도 있었지만 6·25때 공사관 본관과 성당이 붕괴되고 지금 공원이 됐다.

이바셴초프 대사뿐 아니다. 이바셴초프 대사의 후임자인 콘스탄틴 브누코프 신임 주한 대사도 최근 외교통상부에 이 문제의 진행상황을 문의했으며, 연내에 오세훈 서울시장을 예방해 재차 협조를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주한 러시아대사관 관계자는 "평양을 포함해 세계의 거의 모든 주요 도시에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있다"며 "서울 성당 건립 문제는 본국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는 중대 사안"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인 알렉시 2세(2008년 12월 타계)도 "서울에 성당을 세워달라"고 이 대통령에게 요청한 바 있다.

서울시와 외교통상부 관계자들은 "러시아가 에둘러 말하고 있지만, 결국 원하는 것은 '부지' 마련"이라며 "안타깝지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한국 헌법상 특정 종교 지원은 힘들다"고 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러시아가 자체 재원으로 땅을 마련하면 행정 편의를 봐줄 수는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국내에 머물고 있는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있는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 모여 예배를 보고 있다.

정부가 특정 종교 시설이 서울에 들어설 수 있도록 배려해준 전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슬람교 중앙회 관계자는 "한국 정부가 박정희 대통령 재임 중 부지를 무상으로 마련해준 덕분에 이슬람 국가들이 보내준 성금으로 지금 성원을 지었다"며 "오일쇼크와 중동 건설 붐으로 이슬람권 의존도가 컸던 당시 정세의 영향이 있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