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실씨

18일 오후 서울 성동구 옥수동 자택에서 만난 퇴직경찰관 한영실(68)씨는 양손에 묵주를 쥐고 있었다. "8년 전 세배하러 갔을 때 추기경께서 '기도 열심히 하라'고 주신 묵주입니다."

한씨는 1983년부터 1998년까지 16년간 서울 중부경찰서 정보과에서 '명동성당 담당'으로 근무했다. 1980년대 한씨는 옷깃에 최루탄 냄새가 밴 채 살았다. 시국사건이 터지거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 아예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는 명동성당에서 1987년 박종철군의 죽음과 6·10항쟁, 1990년 3당 합당, 1991년 대학생들의 연쇄 분신자살 사태를 겪었다. 그러면서 격랑의 한가운데 고요하게 버티고 선 김 추기경을 지켜봤다.

한씨의 고향은 강화도다. 1963년 건국대 법대를 졸업한 뒤 순경으로 출발해 서울 남부경찰서 수사반장을 지냈다. 1983년 경찰 지휘부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한씨를 전략적으로 명동성당에 배치했다.

추기경은 한씨를 '한 형사'라고 부르지 않고 세례명인 '프란치스코'라고 불렀다. 명동성당이 시위대의 피난처이던 시절, 추기경은 늘 그를 타일렀다. "프란치스코, 학생들이 밖에 나가면 잡아갈 거지? 잡아가면 안 돼."

한씨는 "박종철군 사건 때가 가장 괴로웠다"고 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격앙된 목소리로 "경찰이 박군을 죽였다"고 했다. 김 추기경이 한씨에게 물었다. "경찰이 물고문을 했어?" 한씨는 "마지막까지 아니라고 믿었기에, 진실이 밝혀졌을 때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그는 김 추기경에게 "너무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김 추기경은 조용히 웃었다.

1983년엔 명동성당 안 학생 시위대가 던진 돌에 당시 최재삼 중부서장이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이 있었다. 격분한 전경들이 지시도 없이 성당 안으로 최루탄을 쐈다. 경찰 지도부는 옷 벗을 각오를 했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서장이 크게 다칠 정도였다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다. 한씨는 "추기경의 대범한 결단에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고 말했다.

1990년대 한총련이 명동성당에서 장기 농성할 때, 추기경이 한씨에게 "학생들이니 구속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한씨는 자기 차에 몰래 3명을 태워 서울역에 내려줬다.

한씨는 "16년 동안 수많은 파도가 지나갔지만 추기경이 눈물짓거나 화내거나 동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시국사건이 터질 때마다 장관과 정치인들이 명동성당을 찾았지만 김 추기경은 '더 이상 사태가 확대되지 않게 해달라'는 메시지만 전하고 집무실 문을 열지 않았다.

김 추기경은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외부 식사 약속도 잡지 않았다. 김 추기경은 시국에 밝았다. 누구보다 '큰 그림'을 보는 동시에, 낮은 곳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세세하게 관심을 기울였다. 김 추기경은 명동성당 앞 걸인들을 지날 때마다 웃으면서 5000원짜리 지폐를 건넸다. 신자들이 "노래 불러달라"고 조르면, 빼는 기색도 없이 가수 김수희씨의 '애모'를 불렀다. 설날 때 세배를 가면 높은 사람이건 평범한 사람이건 똑같이 1만원씩 세뱃돈을 손에 쥐여줬다.

한씨는 경찰에서 퇴직한 1998년부터 뇌경색으로 쓰러진 2005년까지 천주교 산하 장애인 봉사단체 '작은예수회'에서 일했다. 김 추기경이 "쉬기는 뭘 쉬어. 나랑 일해"라며 한씨를 붙들어 앉힌 것이다.

병상에 앉은 한씨는 오른쪽 반신이 마비된 몸으로 더듬더듬 기도를 올렸다. "추기경님, 지상 모든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돌봐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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