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연 교수는“논리적 분석과 과학적 실증을 거친 이번 책은‘산중에서 몇 십 년 공부했다’는 식의 해설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정치학에는 동서(東西)가 따로 없어요."

독일 괴테대에서 정치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황태연(黃台淵·51) 동국대 교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분명 '서양 정치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난해하기로 이름 높은 동양고전인 《주역(周易)》을 풀이한 1000여 쪽 분량의 《실증주역》(청계 刊)을 냈다.

사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학(漢學)의 고수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 이래 수십 년 동안 사서삼경을 연구해 왔고, 특히 《주역》은 곽박(郭璞), 정이천(程伊川), 주희(朱熹) 같은 중국 전통 주석가들은 물론 율곡·다산 등 국내 주석, 빌헬름(Wilhelm), 피델러(Fiedeler), 앤서니(Anthony), 린(Lynn) 등 영어·독일어권 학자들의 주석까지 섭렵했다. 반면 국내 《주역》의 대가로 알려진 일부 학자들의 주석은 "너무나 자의적이어서 참고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밤낮 없이 집필에 몰두했다. 강의 없는 날은 하루 종일 책만 썼고, 도대체 무슨 뜻인지 해석이 안 되는 문장을 놓고 몇 달 동안 고민하기도 했다. 8번째 괘(卦)인 '수지비(水地比)'의 '왕용삼구(王用三驅), 실전금(失前禽), 읍인불계(邑人不誡)'라는 문장도 그런 '고약한' 경우였다. '왕이 삼면에서 몰면서 앞 짐승을 놓아주니 읍 사람들이 경계하지 않도다'고 풀이할 수 있는데, '앞 짐승[前禽]을 놓아준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공자는 '역(逆)하는 놈을 버린다'고 풀이했고, 린은 공자의 주석 중 '역(逆)'을 '급선회해 돌아온다(double back)'로 해석했다. '사냥꾼 방향으로 180도 거슬러 달려오는 짐승들은 놓아 준다'는 뜻이었는데 그 동안 엉뚱하게 번역했다는 것이다.

왜 오늘날의 우리가 《주역》을 읽어야 하는가? "그것은 동양의 신학(神學) 체계이고, 우리 문화의 밑그림이기 때문입니다." 태극기도 《주역》에서 비롯된 것이고, '미제 사건'의 '미제(未濟)'나 '불쾌(不快)' 같은 일상어들도 《주역》에 처음 나온다. "허무맹랑한 점술서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점이란 다른 종교에서의 계시(啓示)와도 통하는 것 아닙니까?"

황 교수는 고증(考證)과 논증(論證), 서증(筮證)이라는 세 가지 방법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고증'은 고대 한자와 역사·풍속을 분석해서 원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이며, '논증'은 다른 연구들과의 소통을 통해 더 나은 의미를 도출하는 것이다. 그럼 '서증'은? 직접 점을 쳐 봐서 해석의 맞고 틀림을 따지는 방법이다. 책 말미에는 부록으로 서법(筮法)을 소개했다.

《주역》이 철학서인지 점술서인지에 대해선 지난 수천 년 동안 논쟁이 있었지만, 황 교수는 《주역》에 대한 공자의 '중용적인 입장'을 강조했다. 철학서이자 점술서라는 것이다. "지식에는 경험적인 지식뿐 아니라 선험적(先驗的)인 지식도 필요합니다. 미래를 보려면 직관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지요. 칸트도 물리·과학 같은 순수이성보다 신념·믿음·종교 같은 실천이성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황 교수는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을 지낸 '정책 브레인'이었고, 지난해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훈수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주역》 중에서 현재의 국내 상황에 가장 잘 들어맞는 괘는 무엇일까? "59번째 괘인 '풍수환(風水渙·바람과 물이 흩어짐)'입니다." 《주역》 원문은 이 괘에서 '흩어짐에 서둘러 제단으로 달려오도다(渙奔其机). 한이 풀리리라(悔亡)'고 했다. "민심이 갑자기 흩어지는 시기에, 대통령이 정성을 다해 원래의 정체성으로 돌아가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