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을‘쿠데타’로 규정했던 1961년 5월 17일자 (조간) 조선일보 1면. 조선일보 DB

1961년 5월 16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처음으로 언론에 노출된 육군 소장 박정희(朴正熙)는 선글라스를 쓰고 뒷짐을 진 채 5·16의 상징처럼 돼 버린 유명한 사진을 남겼다. 사진을 촬영한 조선일보 기자 정범태는 "그는 차갑고 무뚝뚝했다. 저런 사람이니까 혁명을 일으킬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날 새벽에 라디오 방송을 들은 국민들은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今朝) 미명(未明)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어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義)로 삼고, 모든 부패와 구악(舊惡)을 일소하며,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악'이나 '기아선상' 같은 어휘들이 이 '혁명 공약'으로 인해 일상어가 됐다.

그것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張都暎)의 이름으로 된 공약이었으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이미 4·19 전부터 '거사'를 논의했으며 그날 새벽 군대를 움직여 서울에 무혈 진입했고, 전 육군 중령 김종필(金鍾泌)이 초안을 잡은 혁명 공약의 최종 교열을 본 사람은 모두 박정희였다. 그날 발행된 조선일보 석간, 이튿날 조간은 서슬 퍼런 검열의 상황에서도 이 사건을 '군부 쿠데타'로 규정했다. 헌법 절차에 의해 수립된 정부를 일부 군부 세력이 불법적으로 전복한 일은 분명한 쿠데타였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가운데)이 박종규 소령(왼쪽), 차지철 대위(오른 쪽)와 함께 서울시청 앞에 서 있다. 조선일보 사진부 정범태 기자가 촬영한 사진이다. 조선일보 DB

문제는 정작 당시의 국민들이 이 쿠데타에 대해 별다른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보세력을 대변한 잡지 '사상계'조차 '혁명'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지난해 출간된 한 연구서에서 현재 좌파 학계의 대표적 학자인 성공회대 교수 조희연은 이렇게 말한다. "쿠데타 세력에게는 부패한 정치권과 국가권력을 개혁해야 한다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지향이 있었다." 한국인의 생활을 송두리째 바꿔 놓게 될 '산업근대화 혁명'의 출발점이야말로 바로 그 '순정(純情)'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