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五星紅旗)가 도심을 뒤덮자 서울 시민들의 입에서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어디서 저렇게 많은 중국 청년들이 쏟아져 나왔을까" 하는 놀라움과 호기심이었다. 서울 시민들은 중국 청년들의 행동을 '애국심'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28일 아침, 중국 청년들을 바라보는 한국민의 시선은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민간인·의경 무차별 폭행 동영상에 여론 급변

여론이 급랭한 계기는 서울프라자호텔 로비에서 벌어진 무차별 폭행을 포착한 한 편의 동영상 때문이었다. 동영상은 중국인으로 보이는 100여명이 호텔 로비 안으로 몰려 들어와 몇 사람을 벽 쪽으로 몰고 국기 깃대와 주먹, 발로 마구 때리는 장면이다. 두 그룹 사이에 낀 정복을 입은 한국 의경들은 무기력하게 밀리다 중국인들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중국 학생들은 '다쓰타(打死他·그놈 때려 죽여라)' '바오첸(抱�·사과하라)'이라고 계속 고함쳤다.

폭행을 당한 사람들은 시민단체 '티베트평화연대' 회원 3명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이날 오후 5시30분쯤 덕수궁 앞에서 중국의 티베트 유혈 진압에 항의하며, 티베트 국기를 들고 시위를 하다 400여명의 중국인들에 쫓겨 호텔로 달아났다가 봉변을 당했다. 폭행을 말리던 의경 중 한 명은 중국인에게 맞아 머리가 찢어져 여섯 바늘을 꿰맸다.

베이징올림픽 성화 국내 봉송이 진행된 27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서 국내에 체류 중인 티베트인이 중국의 티베트 독립시위 무력진 압에 대해 항의하다 주변에 있던 중국인들에게 둘러싸여 맞고 있다. 뉴시스

27일 밤 한 네티즌에 의해 이 동영상이 인터넷에 오르자, 한국 민간인은 물론 경찰까지 폭행하는 중국 학생들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인터넷에는 중국 청년들의 또 다른 무법 행태가 잇따라 공개됐다. 중국 시위대가 던진 나무토막에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는 취재기자와, 중국인이 던진 금속절단기에 맞아 다친 시민단체 간부 모습도 공개됐다. 덕수궁 대한문 근처에선 'FREE TIBET(티베트 해방)'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던 미국 고등학생 4명이 중국인 300여 명에게 둘러싸여 있다, 경찰에 의해 구출되기도 했다.

중국 유학생들은 성화 봉송 2주 전부터 인터넷 커뮤니티에 "27일 올림픽공원에 모이자" "무기는 휴대하지 말고 달걀을 갖고 가서 박살내자"는 등의 글을 올리며 조직적으로 준비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국내 네티즌들이 더 흥분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이런 행태를 두고 "남의 나라에서 이래도 되느냐", "만약 한국 사람이 중국에서 공안을 폭행했다면 죽었을 것"이라며 반감을 표시하고 있다. 각종 포털사이트에는 중국 유학생들의 폭행 현장을 찍은 사진과 그들의 인적 사항을 적은 게시물이 대량으로 퍼지고 있다.

27일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베이징올림픽 성화봉송행사 도중 중국시위대와 봉송 반 대 시위대의 충돌을 취재하던 홍인기 한국 일보 사진기자가 중국 시위대가 던진 나무 토막에 머리를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데일리안

◆"자국민 맞는데 경찰은 뭐했냐" 분노

경찰청 게시판은 성화봉송 경비에만 신경을 쓰느라 자국민을 지키기는커녕, 시위대에 얻어맞는 모습을 보인 경찰을 비난하는 글이 1000여건 올라왔다. "경찰은 중국의 사설경비업체" "한국 시위대는 체포조까지 동원하면서 중국인 시위는 왜 방관하나"는 등의 내용이다.

실제로 경찰은 성화 봉송 당일 9000명이 넘는 대규모 경찰력을 투입했지만, 중국 시위대의 폭행 현장에서 검거나 해산 시도는 고사하고 시민들과 자신들의 안전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경찰은 "중국 유학생들이 이처럼 많이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고 이들을 환영인파로 생각해 시위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성화 봉송 경비에 주력하다 보니 돌발적으로 발생한 폭행사건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프라자호텔의 집단 폭행 현장에서 단 한 명의 중국인도 검거하지 못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경찰청은 27일 밤 '세계의 외신들이 한국의 성화 경비에 대해 칭찬일색'이라는 식의 자화자찬하는 보도자료를 뿌렸다.

◆일부 시민단체 자극도 한 원인

중국인들이 이처럼 대규모로 서울 도심으로 뛰쳐나온 것은 성화가 전 세계를 도는 과정에서 수모를 당한 데다, 한국의 일부 시민단체가 성화 봉송 중단을 사전 예고한 것에 자극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일부 시민단체도 자극적인 행동으로 중국 시위대를 도발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예컨대 성화가 출발한 올림픽 공원에서 일부 시민단체 회원은 길 건너편 버스에 올라가 순수한 '반대 구호'라고 보기 힘든, "중국은 올림픽 개최 자격이 없다"는 등의 말로 중국 시위대를 도발했다.

이 때문에 경찰 경비가 풀리자 중국 시위대가 이들에게 몰려가 거칠게 항의하며 물병과 돌멩이 등을 던졌다. 중국인 시위대와 마찰이 빚어진 곳은 성화 출발지인 올림픽공원 평화광장과 도착지인 서울광장 주변에 집중됐고, 나머지 봉송 구간에서는 별 불상사가 없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서울지역 대학 교수는 "외국에서 자국의 성화를 맞이하는 입장이라면 오성홍기와 함께 태극기, 오륜기를 고루 갖고 나와 흔드는 것이 상식적 행동"이라며 "온통 오성홍기만 들고 나와 폭력적 행동까지 보인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중국인들이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도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