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통한 24시간 예매, 커피숍과 식당과 쇼핑몰이 함께 들어선 환경, 고화질 영상과 입체음향….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가 도입 10주년을 맞은 2008년 한국의 영화관 풍경이다. 오징어와 땅콩을 사 들고 긴 줄을 서서 들어가 비 내리는 화면을 보던 기억이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후배들에게 '원래부터 지금 같았던 건 아니었다'고 얘기해 줄 만도 하다. 하지만 더 옛날에는 과연 어땠을까?

김승구 세종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7일 출간된 학술지 《정신문화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刊) 110호에 게재한 논문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관 체험〉은 '영화'라는 매체가 우리에게 막 도입됐던 시기의 일상사(日常史)에 접근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 논문에서 드러난 1930년대 경성(서울)의 영화관은 이런 모습이었다.

◆극장: 악취와 담배냄새 뒤엉켜…

근대적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대부분의 극장들은 좌석 수 1000여 석의 복층 구조로 선진국 극장에 못잖은 규모였다. 하지만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관객 편의나 위생 측면에선 문제점이 많았다. "조선의 영화관은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덥다는 것이 통례가 됐다" "난로 2개와 선풍기 2~3개가 전부"라는 말이 있었을 만큼 냉난방 시설이 무척 열악했다. 1930년대 말까지도 서울 도심 극장조차 지정좌석이 없었고 한 번 극장에 들어가면 문 닫을 때까지 계속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실내는 무척 혼잡했다. '냄새' 문제도 심각했다. 화장실 악취, 정원을 초과한 관객이 빚어내는 체취와 담배 냄새가 뒤엉켜 "유아를 데리고 극장에 가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신문기사까지 나올 정도였다.

◆관객: 현실 잊고 '메리'의 연인으로

당시의 한 지식인은 대중이 영화관을 찾는 이유에 대해 ①기호성(嗜好性)의 발작(發作) ②생(生)의 적막(寂寞) ③피로(疲勞)된 영(靈)의 안식 ④심심풀이라는 네 가지로 설명했다. 엄혹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하는 오락으로서의 기능이 컸다는 것이다. "값이 싸고 화려하고 자미(滋味·재미)있는 오락은 영화를 제외하고는 달리 없는 까닭이다. …영화관중들은 누구나 메리이(메리 픽포드)의 애인될 자격이 있는 셈이 된다. 가르보(그레타 가르보)도 웨스트(매 웨스트)도 듸트리히(마를렌 디트리히)도 다 애인이 될 수 있다."(〈조광〉 1937년 12월) 하지만 영화가 오히려 현실을 환기시킬 때 뜻밖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는데, 1934년 황금만능주의를 소재로 한 영화 《금색야차》를 상영하던 도중 한 청년이 자살을 기도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관람: 상호작용에서 개인적 몰입으로

영화 상영은 보통 하루에 세 번이었고, 1회 상영에 걸린 시간은 세 시간 정도였다. 장편 극영화 1편에 단편 영화와 뉴스가 더해졌고, '막간 흥행'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간 흥행이란 음반사의 협찬으로 유성기 음악을 틀어주거나 악단이 공연하는 '주악(奏樂)', 그리고 춤과 노래가 등장하는 '쇼'였다. "쇼도 보고 영화도 보는" 형식이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발성 영화가 도입된 이후에도 변사는 계속 해설을 맡았는데, 대사도 해설도 없는 대목이 나오면 "변사 죽었니? 해설해!"라고 고함을 치는 관객도 있었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 변사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관객에겐 서서히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화면만을 응시하는 '정숙한 관람 태도'가 생겨났다. 이제 영화 보기의 체험은 '변사와의 상호작용'에서 '개인적 몰입'으로 바뀌어가게 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