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제 아티스트 이영란이 공중에 매달린 던컨왕의 커다란 얼굴(찰흙 덩어리)을 주먹으로 터뜨렸다. 찰흙 안에 가득 차 있던 밀가루가 날리며 바닥으로 쏟아진다. 다른 인물들은 돌덩이처럼 굳어지는데, 레이디 맥베스(서주희)가 말한다. "이 손, 이 씻겨지지 않는 핏자국. 없어져라, 없어져라 이 저주받을 자국아. 기억아 살아나지 마. 날 가만히 놔둬…." 레이디 맥베스는 사각의 기울어진 무대 한쪽 구석에 차오른 물로 첨벙 몸을 던졌다.
연극 《레이디 맥베스》(연출 한태숙)는 바로 이 대목부터 관객에게 특별한 체험으로 남는다. 10여분쯤 될까. 이영란은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길다란 끈(또는 채찍)으로 레이디 맥베스를 친친 감는다. 레이디 맥베스는 뱀에 감긴 듯 바닥을 뒹굴며 괴로워한다. 밀가루에 물을 섞었을 뿐인데, 밀가루 반죽은 극적 에너지를 끌어올리며 관객을 집중하게 한다. 퉁퉁 소리까지 낸다. 마지막 순간 무대 한쪽 벽이 열리고 어둠에 잠긴 토월극장 객석이 드러난다. 신음 같은 노래와 종소리가 흘러나오고, 레이디 맥베스는 긴 다리를 건너 어둠 속으로 지워진다. 질질 발 끄는 소리까지 또렷이 들린다.
《레이디 맥베스》는 설문조사를 통해 예술의전당 20년 역사를 대표하는 연극으로 뽑혀 이번에 리바이벌됐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맥베스 부인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이 연극은 연기·연출·오브제·음악까지 한 목소리로 돌진해온다. 서주희는 연극 관객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눈에서 빛이 나오는 연기'를 보여줬다. 시간이 갈수록 찰흙과 밀가루로 범벅이 된 배우 정동환도 믿음직스러웠다.
대학로 연극과는 다른 스타일로 무장한 《레이디 맥베스》는 원작을 모르는 관객에겐 추상에 머물 수 있는 약점도 노출했다. 상징과 생략이 많고, 오브제로 이야기하는 화법에 익숙하지 않을 경우 극 중반까지는 괴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토월극장 무대에 객석(300석)을 만들고 공연한다는 점, 무대 밖 어두운 공간까지 이야기 속으로 끌어안은 점 등은 내면을 여행하는 이 연극과 잘 어울렸다.
▶4월 15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02)580-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