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현장의 안전불감증이 또다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대형 참사를 낳았다. 화학물질이 가득한 창고에서 변변한 안전장비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인부들이 작업하다 폭발과 함께 불이 났다. 현장의 스프링클러 등 화재진압 안전설비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인화물질 가득한 창고에서 용접작업
인부들이 냉동창고 내부 공사를 위해 들어간 시간은 오전 8시쯤. 인부들은 대부분 전기·냉동·청소업체에 소속된 일용직 근로자들이었다. '코리안 드림'을 좇아 온 조선족 동포도 많았다. 당시 지하창고 안에는 시너 유증기와 프레온 가스, 암모니아 가스, 우레탄 폼 통 등 인화성이 강한 화학물질이 가득 차 있었다.
생존자와 목격자들에 따르면 화재는 오전 10시50분쯤 지하 1층 기계실에서 시작됐다. 인화성 물질이 가득 찬 창고에서 작업인부들은 배관설비를 위한 용접작업을 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화재가 발생하고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자 인부들은 제각각 창고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화재 현장에서 탈출한 박종영씨는 "불난 것을 보고 나서 불과 4~5초 지나 순식간에 불길이 전체 창고를 뒤덮어 앞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무조건 출입구 쪽으로 달려 나갔다"고 말했다. 사고 당시 화재 경보음은 물론 대비를 알리는 방송도 없었다. 이천소방서 관계자는 "이처럼 인화성 화학물질이 가득 차 있는 곳에서 별도의 안전 장비도 갖추지 않고 용접작업을 했다는 건 거의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창고에는 스프링클러도 무용지물이었다. 폭발이 나면서 스프링클러에 연결된 작은 관들이 끊어지면서 작동하지 않았다고 소방당국은 밝혔다.
화재는 유증기와 만나 연쇄 폭발로 이어졌다. 사방으로 튀기 시작한 불똥은 건물 안 내장재인 샌드위치 패널, 작업을 하다 남아 있던 우레탄 폼 통에 옮겨 붙었다.
지하 1층은 2만3338㎡로 운동장만한 넓이였지만, 순식간에 시커먼 연기를 뿜어 내는 독가스실로 변했다. 창고 내장재로 사용된 샌드위치 패널과 우레탄 폼 등이 불에 타면서 내뿜는 맹독성 가스 때문이다. 화재 진압에 참가한 한 소방관은 "인부들이 유독가스를 마신 상태에서 출구를 찾아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밀폐된 공간에 소방설비는 부족
화재 현장에 소방차가 처음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55분쯤. 소방차 214대, 소방관 622명, 경찰 2개 중대와 교통기동대 등이 출동했다. 소방관들은 외부에서 화재 진화 작업을 벌였지만 오후 2시까지 3시간 이상 건물 내부로 진입하지 못했다. 창고는 출입구가 있는 정면만 지상으로 노출돼 있었을 뿐 지상은 콘크리트로, 다른 벽면은 땅속에 박혀 있는 구조였다. 외부로 향한 창문이나 환기구도 변변히 없었다.
이천소방서 관계자는 "불길이 치솟았지만 물을 뿌릴 수 있는 곳이 출입구 쪽밖에 없어 화재 진압에 시간이 걸렸다"면서 "이처럼 폐쇄적인 구조를 가진 건물에 화재 예방 장비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창고에 가득 차 있는 화학물질로 인한 폭발이 계속 이어져, 소방관들은 폭발이 잦아든 오후 2시30분쯤 창고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화재 초기 지하 1층 기계실에 가득 차 있던 인화성 가스는 지난달 말 이 건물 지하층의 외벽과 천장에 단열을 위해 10㎝ 두께로 '우레탄 폼'을 씌우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방 당국은 탈출하지 못한 인부들은 맹독성 가스로 곧바로 정신을 잃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창고를 운영하는 '코리아2000' 관계자는 "우레탄 폼 작업을 하다 발생한 가스가 아니라, 창고 내 화학물질에 불이 붙은 게 화재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작업 후에 가스가 얼마나 차 있었는지 우리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우레탄 폼(urethan foam)
우레탄 폼(urethan foam)은 열을 차단하는 단열재나 소리를 흡수시키는 방음재 등으로 쓰이는 화학물질이다. 거품 형태의 '우레탄 폼'을 벽에 뿌리면 순식간에 고체로 굳어져 사용이 편리하다. 그러나 우레탄에 불이 붙으면 인체에 해로운 유독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1999년 발생한 인천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사건에서도 내부장식재였던 우레탄 폼이 타면서 생긴 유독가스로 57명이 사망했다.
▲8일자 A3면 '대형 화재사고 일지' 기사 중 대구지하철 중앙역 방화사건의 사망자 수는 51명이 아닌 192명이므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