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침대에서 백조 인형을 품고 자다 악몽을 꾸는 왕자. 창가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백조는 깃털 바지만 걸친 근육질 남성이다. 잠에서 깬 왕자는 침실로 들어온 여왕(어머니)이 안아주길 바라지만 여왕은 거부한다. 그녀는 왕자의 손길을 뿌리치며 이렇게 강요하는 것 같다. “더 강한 남자가 되거라.”
매튜 본의 댄스 뮤지컬 ‘백조의 호수’엔 마법에 걸려 밤에만 백조로 변하는 공주 오데트와 지그프리트 왕자의 사랑 이야기(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는 온데간데 없다. 온전히 남은 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뿐이다.
남성 백조들로 유명한 이 댄스 뮤지컬이 한국에서 여름마다 ‘마법’을 부리고 있다. 2003년(티켓 판매율 91%)과 2005년(96%)에 이어 올 여름 세 번째 날아온 매튜 본의 ‘백조…’(7월 4일부터 LG아트센터)는 벌써 70%가 넘는 표가 팔렸다. 2000년대 들어 이 땅에서 ‘3연타석 홈런’을 때린 내한공연은 없었다. LG아트센터는 “혼자서 열 번 이상 보는 관객도 있을 정도로 중독성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동성애는 ‘백조…’의 중요한 관람 포인트다. 안무가이자 연출가 매튜 본은 동성애자(게이)고, 무용수들도 절반 이상이 게이로 알려져 있다. 매튜 본과 무용수들은 커밍아웃한 연예인 홍석천이 운영하는 이태원의 바에 종종 드나들었다. ‘백조…’에는 왕자와 여왕, 왕자의 여자친구가 공연장을 찾아 여장남자 무용수들이 펼치는 우스꽝스런 공연을 관람하는 대목이 나온다. 또 왕자가 런던 뒷골목의 클럽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여장남자 무용수나 런던 뒷골목 클럽은 기존의 고전 발레는 바라보지 않던 공간들이다. 클럽에서 쫓겨나 길바닥에 쓰러진 왕자 앞에 나타난 남성 백조들의 춤은 크고 역동적이다. 날갯죽지와 머리로 왕자를 공격할 땐 난폭하기까지 하다.
땀이 흥건한 남성 백조들의 몸이 조명에 반사될 때 묘한 흥분을 느끼는 관객도 있다. 동성애자인 Y모(31)씨는 “게이들의 성 판타지인 해군들과 트랜스젠더(성전환자) 같은 쇼걸들이 등장한다는 점, 여성의 보호를 받던 왕자가 남성을 보면서 겪는 성적 갈등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동성애 코드가 뚜렷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공연예매사이트에 집계된 이 공연 관객은 여성이 8할이다. 8월 국립발레단이 공연할 고전 발레 ‘백조…’의 예매자와 수치상으로 볼 때 남녀 비율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매튜 본의 ‘백조…’에 대해선 거부감을 드러내는 남성이 적지 않다. “그 요상한 걸 왜 보냐”는 식이다.
전직 유명 발레리나들 사이에도 견해차가 있었다. 최태지 정동극장장(전 국립발레단장)은 “남성 백조가 여성 백조보다 훨씬 아름답다”고 말했고,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은 “남자는 남자다운 춤, 여자는 여자다운 춤을 출 때 가장 빛난다”고 했다. 고전 발레 ‘백조…’ 안무가는 어떨까. 지난 4월 한국에 온 유리 그리가로비치(러시아)는 매튜 본의 공연에 대해 “안 봤다. 앞으로도 볼 생각 없다”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루돌프 누레예프, 나초 두아토, 크리스토퍼 휠든 등 유명 안무가 중에도 동성애자들은 많다. 스위스의 어느 발레단 예술감독이 게이인데, ‘수청’을 강요하는 통에 견디지 못하고 나오는 남자 무용수들이 많다는 말도 떠돈다. 서양 공연장엔 게이·넌게이(동성애자·이성애자)로 구분된 분장실까지 등장했다.
차이코프스키의 3대 명작 중 하나인 ‘백조…’는 고전 발레의 대명사다. 그런데 여느 고전과는 발레리나의 손 모양부터 다르다. 다른 작품에선 항아리를 잡듯 손바닥끼리 마주보지만 ‘백조…’에선 밖으로 향한다. 날갯짓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팔을 허우적거리느라 무용수들의 피로가 심해 하루 2회 공연을 할 수 없는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예술가의 성 정체성이 그가 하는 예술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창작자의 관심과 그의 예술은 무관하지 않을 때가 많다. 매튜 본이 ‘백조…’에서 왕자가 백조를 닮은 낯선 남자에게 거절 당하는 대목에서 그림자들까지 춤으로 표현할 땐 깊이가 놀랍다.
셰익스피어 원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을 남성으로 바꾼 ‘로미오, 로미오’를 준비 중이라는 그는 익숙한 걸 낯설게 만드는 데 재미와 의욕을 느끼는 안무가다. “세상은 흑백으로 가를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고 말하는 매튜 본은 ‘백조…’의 동성애 코드와 관련된 질문에는 늘 “그 작품은 사랑 받지 못 하는 외로운 남자의 이야기일뿐”이라고 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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